<지금 이시각>_ Time Now
<지금 이시각>, 월간지 형식의 월간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획자 : 오종원, 발행 : 피그헤드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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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시각> 2023년 8월호, 참여필진 : 김유주, 김희진, 오종원, 이채연
신규 참가자 및 게스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김 유 주
쉬어가는 사람
“조심 좀 하지.”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유럽여행은 쉽지 않았다. 외국인을 반겨주는 아시아를 여행하고 와서 그런가, 얼마 안 되는 예산과 높은 물가 때문인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가 않았다. 유럽에 온지 두 달,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지쳤고 유럽여행을 슬슬 마무리하기로 했다. 유럽에서 저예산 장기 배낭여행은 역시 어렵다는 생각을 나누며 스페인으로 향했다.
스페인의 첫 인상은 ‘무질서와 자유’였다. 나는 첫인상이 좋다고 신이 났고 하루 이틀 다녀본 뒤 15일이라는, 한 도시 최장기간 체류를 결정하게 되었다. 유럽여행의 아쉬웠던 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아름답게 마무리 하자는 생각으로 유럽에서 남은 기간을 스페인에서 모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운 좋게 숙박비가 비싼 바르셀로나에서 저렴한 숙소를 찾았는데 연장을 하겠다고 하니 호스트가 우리 사정에 맞춰주며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머물 수 있게 배려해줬다. 게다가 스페인에 오기 전, 감사하게도 친구가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며 돈을 보내왔다. 이 돈은 무조건 스페인에 가서 쓰겠다고 생각하고 스페인의 맛집과 대표음식들을 쭉 저장했다. 배고픈 유럽여행에 대한 서러움을 스페인에서 모두 풀고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몇 일을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참 멋진 도시였다. 활기가 넘치는 도시의 하늘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파랗고 갈매기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언제 다시 스페인 여행을 올지, 어느 도시를 방문할지, 얼마나 머물지를 상상하며 밤마다 수다를 떨기도 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듯 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 4일차, 이 모든 바르셀로나 로맨스가 끝이 났다. 분위기 있어 보이는 골목의 어느 카페에 들어가 맥주를 사먹고 한국라면이 땡긴다며 김치와 라면을 잔뜩 사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였다. 두 정류장을 남기고 친구와 나의 사이로 팔에 깁스를 한 것 같은 남자가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당연히 짜증이 났지만 몸이 불편한 것을 발견하고는 어쩌지 못하고 더 이상 친구와 멀어지지 않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화려하게 꾸민 여성이 내 앞에서 지하철 노선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못 알아듣는다는 제스처를 보였는데도 계속 말을 걸어오자 나는 한국어로 “아니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왜 자꾸 말을 걸어. 옆에 스페인 사람한테 물어봐.”라고 짜증 섞인 어조로 말을 뱉었다.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이 모든 것이 이상했음을.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바로 다음 정류장에 남자가 내리려는데 친구의 가방이 열려있는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 쪽으로 몸을 붙이고 친구에게 “너 가방 왜 열려있어?”라고 다급히 물었다. 나의 다급함에 남자는 나를 보며 내리더니 자기 가방을 보여주며 한 번 확인해보라고 말을 했다. 언어는 모르지만 확실했다. 나는 친구에게 “일단 내려!!!”라고 소리치고 남자를 붙잡아 가방을 뒤졌다. 옷도 뒤졌다. 심지어 죄송하다고 하고는 바지 주머니까지 더듬으며 모두 뒤졌다. 친구는 가방에 있던 내 핸드폰과 지갑이 없다고 했다. 젠장, 남자는 두 팔 다 멀쩡했다.
지하철역에는 그 남자와 우리 둘 뿐이었다. 남자는 우리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핸드폰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나는 남자를 따라가 “아임 쏘리”를 연신 내뱉으며 계속해서 남자의 가방과 옷과 주머니를 뒤졌다. 갑자기 남자는 시계도 없는 손목을 가리키며 늦었으니 가봐야 한다고 했다. 에스컬레이터 앞이었다. 나는 왜 그때 그 남자를 보냈을까. 남자가 떠나고 한 번 더 친구의 가방과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핸드폰과 지갑은 없었다. 멘붕, 이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인가. 말 그대로 이성적 판단이 안 되는 상태였다. 십 여분 지난 뒤 우리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올라가니 역무원들이 있었다. 이 에스컬레이터만 그 남자와 함께 올라갔어도 역무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아쉬웠다.
친구가 역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친구의 전화로 모든 카드를 분실신고 하고 핸드폰 어플리케이션이 깔려있는 은행은 계좌정지까지 했다. 유럽에서는 내 체크카드에 돈을 모아 사용하고 있었고,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린 덕분에 현금은 커녕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카드도 없는, 말 그대로 땡전 한 푼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역무원은 당장 경찰서로 가라고 경찰서 위치까지 가르쳐줬지만 경찰서는커녕 집으로 갈 돈도 없었다. 결국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을 탔다. 각 역마다 역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부탁해서 무료로 지하철을 타고 경찰서까지 갔다. 우리는 경찰서에 도착해서 잠시만 wifi를 사용할 수 있도록 부탁을 했지만, 그들은 단번에 거절했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또 한참 기다려야 할까봐 경찰서에서 자리를 지켰다. 이것저것 서류를 작성하고 통역관과 대화를 나누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imei 번호를 알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다시 숙소까지 같은 방법으로 무임승차하며 갔고 숙소에서 노트북으로 imei 번호를 알아냈다. 자정이 훌쩍 넘은 때였다. 지갑도 돈도 괜찮지만 핸드폰은 달랐다. 5년간의 모든 것이 그 핸드폰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진들은 모두 클라우드나 외장하드에 옮기지 않고 핸드폰에 보관했고, 어리석게도 보안카드나 신분증 등 중요한 것들을 핸드폰 사진첩에 보관했다. 모든 은행거래를 핸드폰으로 했고, 모든 기록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어리석게도 그랬다. 정말 후회스러웠다. 지금은 핸드폰 없이 여행을 지속하고 있지만 다시 내게 핸드폰이 생긴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갔을 때, 노트북으로 확인해보니 우리가 경찰서에 있는 동안 카드 사용알림이 여러차례 와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숙소에서 카드 사용내역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잔액 부족’이라는 내용의 알림이 왔다. ‘경찰서에서 잠깐만 wifi를 쓸 수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 잡을 수 있었을텐데..’ 새벽 4시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고 경찰서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암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몸은 기운이 하나도 없지만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망할 바르셀로나!!’
경찰서에 도착해 또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경찰에게 imei 번호를 알려줄 수 있었다. 새로 경위서를 작성하기 위해 통역관이 우리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우리는 용의자의 용모와 당시의 상황을 정말 상세하게 설명했는데 통역관이 가만 듣더니 지루하다는 듯 펜을 잡으며 “그게 그들의 직업이야.” 라고 말했다. ‘직업? 직업이란 말을 범죄에도 쓰나?’ 우리의 이야기를 자르고는 익숙하다는 듯 그 이후 이야기까지 유추하며 얘기하는 통역관의 태도에 우리는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아, 이 곳에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없구나. 그냥 소매치기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인가?’ 그 이후로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우리는 달랑 종이 세 장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얘기한 내용이 타이핑 된 종이였다. 반나절을 경찰서에서 보낸 우리의 손에 쥐어진 전부였다.
숙소로 돌아와서 경찰서에서 받은 문서를 보니 뭔가 이상했다. imei번호는 분명 15자리인데 몇 번을 확인해도 11자리만 적혀있었다. imei 번호를 알아오라던 경찰은 imei번호가 몇 자리인지도 모르고 있었고, ‘오토매티컬’한 방식으로 작성된 서류라 수정이 안 됨을 강조하며 우리에게 준 종이에는 컴퓨터가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나 싶을 정도로 빈틈이 많았다. 결국 우리는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의 경찰서는 대기 시간이 긴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는 이 어이없는 경찰의 실수를 수정하기 위해 또다시 4시간이 넘게 기다려야했다. 이틀 째 눈을 못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찰서를 나서면서 스페인에서 내 핸드폰과 지갑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어떤 용모의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우리 가방이 열려있었는지, 어느 역에서 몇 시 몇 분에 그 남자가 떠났는지, 그리고 실시간 카드 사용처까지 우리는 모두 갖고 있었지만 소매치기범을 찾을 수 없었다. 경찰들에게 우리는 그냥 운이 나쁜 관광객에 불과했다. 그들은 “내가 장담하는데, 핸드폰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절대 개인정보 도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거야. 그런 일은 거의 없어.” 라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우리를 안심시키려 했을 뿐 다른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그들이 작성해주는 문서들을 받아 볼 때마다 실망과 배신감을 느껴야했다. 기본적이거나 중요한 정보들이 엉터리로 작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정을 요청하면 “나. 바. 빠.”라고 눈에 힘을 주며 정색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이 불운한 관광객들을 잘 달래 돌려보내려 했을 뿐.
나는 확인 강박이 있다. 실제로 이 강박증으로 20대에는 상담도 받았고, 나와 같이 지냈던 친구나 가족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는 나의 지병 중 하나다. 물론 나보다 훨씬 심한 강박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도 한 때는 말도 못하게 심했었고, 지금은 그냥 만성감기처럼 생각하고 나의 일부로 여기고 지낸다. 여행하면서도 매 순간 가방을 만지작 거리며 무엇이 들었나 확인을 하는데, 이 날은 가볍게 여행하자고 나의 작은 가방에 친구와 나의 소지품만 넣고 번갈아가며 가방을 들었다. 지하철에서 그 남자가 친구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시야를 가렸을 때도 친구 얼굴이 보이자마자 가방부터 확인했다. 나는 너무 한탄스러웠다. 이 확인하는 병 때문에 고생스럽게 지낸 세월이 스쳤다. 계속해서 예민하고 긴장된 상태로 불안해하는 것은 겪어본 사람만 아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에 소매치기를 당했다. 습관처럼 가방을 확인하려고 할 때 마침 옆에서 나타난 여자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남자가 비켜서자마자 제일 먼저 가방을 확인했지만 가방은 이미 털린 후였다. 이 확인하는 병은 내 인생에 고통만 주고 중요한 순간에 전혀 도움이 못 되었다. 화가 났다. 왜 그 순간에 확인하지 못했는지, 왜 그 순간에 상대의 장애(실제로 장애가 아니었지만)에 불쾌함을 참았는지. 모든 것이 수상한 상황이었는데 왜 그렇게 당했는지. 그리고 왜 그 남자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았는지. 너무 화가 났다. 중요한 상황에 멍청하게 있었던 나 자신이 못마땅해 화가 났다. 분노가 나를 향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잠도 못 자고 숙소에서 노트북으로 어떻게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검색하고 친구의 전화로 대사관, 은행, 통신사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서로 무너지지 않으려 이 악물고 눈물을 참고 있는데 이번엔 숙소 옆방에 새로 들어온 이탈리아 남자들이 대마에 취해서 우리 방문을 두드리고, 우리를 부르고, 울고,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서로 싸우고 난리를 친다. 하고 싶으면 아무도 없는 산속에나 가서 할 것이지 하필 불쌍한 우리를 상대로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인지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숙소에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다 하필 그 날 우리가 묵는 방은 잠금장치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약에 취한 녀석들은 우리 방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깊은 새벽, 우리는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얼마 뒤 호스트가 와서 이탈리아 놈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숙소에 장기로 묵고 있던 중국인 언니와 넷이서 함께 맥주를 마셨다. 세상이 우릴 버려도 우리를 따뜻하게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호스트는 우리가 가족이라며 냉장고를 털어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었다. 엄마와 동갑인 중국인 호스트는 좋은 사람 같았지만 술이 들어가니 이상해졌다. 나에게 번역기로 좋아한다고 고백하질 않나 땅콩을 까는 친구의 손을 자꾸만 잡질 않나.
다음날 오후에 정신을 차린 우리는 호스트 때문에 언짢기는 했지만 그래도 숙취로나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고 생각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방을 나섰는데 호스트가 우리를 위해 음식을 한 상 가득 준비해놓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호스트가 불편해 한사코 거절했지만 함께 가족원(?)이 된 장기투숙 중국인 언니도 우리를 기다리겠다고 하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호스트는 이상함을 넘어 확신의 만행으로 우리를 불쾌하게 했다. 중국인 언니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우리의 팔을 만지거나 껴안으려고 했다. 심지어 주방에서 그릇을 찾고 있는데 귀신같이 알고 다가와서는 뒤에서 껴안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정색하며 하지 말라고 불쾌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며 웃어넘기는 호스트를 보며 우리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당신이 괜찮아! 우리가 안 괜찮다는데!!” 목격자가 없을 때만 그러는 것이 더 화가 났다. 우리는 되도록 중국인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 했고 다행히(?) 금방 자리를 끝낼 수 있었다. 한국이었으면 당장 신고했을 거라며 친구와 분노를 토해냈다. 스페인 경찰을 겪어본 우리는 절대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우리는 이 숙소에 15일치의 숙박비를 지불했으며, 그 일정에 맞추어 비행기까지 예매되어 있는데다 소매치기를 당해 돈도 없는 상태였다. 잠금장치가 잘 되어있는 방으로 옮기고 분노를 억누르며 하루 종일 방 안에서만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불과 3일 안에 겪었다. 세상이 싫어졌다. “망할 바르셀로나, 뭣 같은 세상!!!” 우리는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까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바로 옆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는 것과 분실물 센터를 찾아가는 것 외에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발 빨리 내일이 오길. 어서 바르셀로나를 떠날 수 있기를'.
상실감과 후회와 분노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친구와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그 남자를 보내지만 않았더라도..”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도 “그건 우리 탓이 아니야.” 라고 최대한 단호하게 서로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에 화가 날 때마다 “그 놈들이 나쁜 놈이야. 우리에게 잘못은 없어”라고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걱정되어서 혹은 속상함에 “그러게 조심 좀 하지..”라는 말을 뱉는 사람들에게도 “그건 우리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내 확인 병 덕분에 그래도 범인 얼굴이라도 봤고, 무엇이라도 해봤던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님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는 말을 멈추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눈물을 애써 참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그 일로부터 삼 주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우리는 지금도 얘기한다. 절대 ‘조심 좀 하지’라는 말을 뱉지 않기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한 사건에서 속상한 마음에, 아쉬운 마음에 피해자를 탓하는 것을 하지 않기로. 그것이 걱정에서 시작된 말이라도 그것은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묻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피해자의 잘못으로 피해자가 되는 일은 없다. 피해자는 피해자이고, 사건을 만든 것은 가해자이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지 않을 때 철저히 타인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대체로 인간은 크기의 차이일 뿐 비슷한 감정과 경험을 겪는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에서 읽는다면 타인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나의 고통을 잊지 않기로 했다.

김 희 진
노동자
의자의 가설
직관을 직관보다 열등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유일한 방법을 표현이라고 칭하며, 그 속에서만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반대로 표현이 아닌 것은 감각이나 단순히 외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이를 논증하는 데에 나는 사다리꼴을 예로 든다. 도형을 형상으로 만들지 못하면, 어떠한 직관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 여기서 직관이라 칭하는 것은 사다리꼴에 대한 심적 통찰 자체, 즉 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 사다리꼴을 그리는 신체의 행위를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차라리 그에게는 직관과 표현이 동일한 심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에서 돌기를 제거하고 하나 둘 그렇게 시작한다.
내가 만든 의자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책상은 각 의자들의 자리가 모여 흘러가는 방향과 그 정도의 크기 합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그 방향과 정도의 크기를 합쳐 문고리라 하자. 그렇다면 책상은 의자가 공통으로 합의한 문고리를 의미한다. 이 큰 고리의 연쇄를 따라 의자들은 움직이지만, 모든 것은 역사적 흐름과 상충하는 저마다의 작은 문고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고리를 떼어 묶고 이단이라며 꾸짖을 수는 없다. 첫째로 항상 책상과 완벽하게 같은 고리를 가진 의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책상의 큰 연쇄조차도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존에는 상충하던 의자도 후에 책상의 공간과 꼭 맞아떨어질 수도 있다. 한편, 상충하는 의자의 연쇄는 그 크기만큼 책상의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위에서 정의하듯 세계를 구성하는 각 의자는 고리를 이룬다. 또 그 합이 책상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책상의 연쇄 크기는 의자의 개수가 아니라 높이다. 단, 이는 독단적인 동의로 얻어진다. 무척이나 아쉽다. 의자의 높이와 개수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덧셈에 관한 항등원, 적당히 무시할 수 있는 의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의자와 그 반대 방향의 의자는 결국은 책상 안의 어떠한 것을 목적으로 해서 집합으로 엮을 수 있다. 하지만 주류와 반대하는 의자는 그 의미가 대부분 묵살된다. 악의 꽃봉오리는 여기에서 핀다. 책상의 틈이 벌어진다. 계속해서 말하듯 각 의자의 크기와 방향은 책상의 영향을 받는다. 책상이 가진 관성을 의자는 그대로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상 안에서는 책상을 적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 책상 밖의 관측자 또한 책상의 변화와 독립적이지 않다. 책상의 밖이라는 말도 사실은 모호하다. 이제 책상은 큰 이끌림으로 작용하고, 의자를 조종한다. 이 의자들은 높이의 가중을 가지고 다시 책상을 결정한다.
지금까지의 견해 집합을 깨고 책상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보이는 의자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 의자가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또는 책상에 지진과 같은 재난이 일어나 많은 의자의 일상을 지나치게 바꾸는 일이 벌어질 때 책상이 깨진다. 이러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방금 내가 앉은 의자의 왼쪽 다리가 달아났다. 잠에 깨서 여느 때처럼 손으로 몸을 쓸어보는데 왼쪽 허리 아래가 어금니 빠진 자리처럼 휑뎅그렁했다. 오래도록 빈자리였다는 듯이 빈자리는 정교하게 매끈하다.
이러한 일 또한 흔하지 않다.



이 채 연
창작가 /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주부
나무의 노래_2
7월호에 이어서 이번에 출간한 그림책에 대한 글입니다.
제목은 <나무의 노래>입니다. 글은 이수연 작가님이 썼고 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제강점기 희생당한 넋, 특히 위안부(소녀)를 삼천리 방방곡곡의 나무들이 기리는 내용으로 그림은 병풍식 또는 아코디언식식 구성으로 쭉 연결되어 이어지는 형태의 책입니다.
책의 중요부분인 마지막 그림에 대한 작업 노트입니다.
마지막장 그림에 대해

그림의 전체적인 틀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왔다.
일월오봉도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천지자연이 우리나라를 보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그림도 일원오봉도처럼 해와 달, 산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참혹한 과거로부터 소녀를 지켜 주고 품어준다.
무릉도원도는 전통적인 이상향의 장소를 그린 그림이다. 소녀가 현생에서는 슬픈 생을 살다가 갔지만, 후생에서는 전쟁이 없는 이상향의 땅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조선시대 무릉도원 작품의 이미지를 참고했다.
그림의 ‘산’의 전체적인 구성은 조선후기 화가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를 참고했다. 금강전도는 마치 새가 되어 하늘은 나는 것 같은 부감(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 봄)형식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원형구도에 토산(土山)과 암산(巖山)이 태극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금강전도의 구성처럼 이 그림 역시 왼쪽에는 토산(土山) 오른쪽에는 암산(巖山)있다. 토산에는 소녀의 과거와 관련된 것이 있고, 암산에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있다. 토산의 형태는 초록색의 경사가 완만한 반원모양으로 여성의 가슴 또는 무덤을 연상된다. 그에 비하여 암산은 분홍색의 솟아오른 형태로 여성의 유두와 닮아 있다. 토산과 암산 둘 다 땅에 묻힌 소녀를 상징하기도 하고 차갑게 죽어간 소녀의 삶과 몸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의 중앙에 가로로 강이 흐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물이 지나가는 길은 생명을 생성하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도 하지만,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우리의 어두운 역사인 분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 종 원
문화예술인력 / 피그헤드랩 운영
공모지원사업, 지원자, 주최자
1. 예전, 지원자의 입장에서 서울문화재단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내 탈락 사유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다 생각하지만 서울문화재단은 청년 예술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공모 제도이고 넉넉한 지원금만큼 많은 이들이 지원하는 편이었다. 나 역시 두어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고 결국 전화를 걸게 되더라. 2017년도의 일이었다.
당시 전화를 받은 직원분은 대체로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지만, 문제는 내가 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심사의 기준도, 심사위원의 어떤 의견 같은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공개할 수 없다는 내용뿐이었고 그것이 첫 전화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것을 당시 제일 대중화된 SNS인 페이스북에 공론화하였다.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몇 년간 공모에 계속 지원하고 있던 와중에, 내가 떨어졌는데 그 이유를 모를 수도 있는 것인가? 몇몇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고, 그 중에는 메시지를 통해 조언을 주신 분들이 계셨다. 한 선생님께서 서울시에 정보공개 청구가 가능하다는 팁을 주셨고, 곧 그것을 통해 서울문화재단의 심사관련 자료의 열람을 요청하게 되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나는 배점표를 받을 수 있었다. 별도의 코멘트는 없으며, 전체적으로 남긴 심사평이 그 기준점이란다. 각 4가지의 세부적인 평가지표를 구분하였고 5명의 심사위원들이 그에 따라 A부터 D까지 점수를 기입해 놓았다. 이것이 일종의 종합점수로 합산되어 당락이 정해지는 것이다.
2.
많은 예술가들이 결국 공모지원사업에 목을 매게 된다. 공모지원과 그것을 통한 경력유지, 거기에 수반되는 제작비 협조와 활동 기회 마련은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불가피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모사업에 굳이 분류를 나누자면 기업체 및 민간 등의 사설에서 운영하는 방식과 공기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방식이 있는데, 사설 공모가 강한 메리트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공모지원을 더 쫓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듯한 기분이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지원 제도에 당선이 되어 ‘지원을 받는 것’만으로는 생계유지는 불가능하다. 무슨 상, 무슨 대상을 받았다는 것은 개인이 가진 가능성의 발현을 누군가는 인정하였다 정도의 의미이지, 현재 문화예술계의 지원 규모 자체를 생각해보면 돈으로는 몇 백만원에서 천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의 지원금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재료비 등을 생각하면 생계에는 보탬이 거의 안되는 수준. 현재로선 예술가(꼭 청년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은 공간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제작비도 지원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주최측은 공모지원을 왜 하는가? 냉정하게 얘기해보자면, 공모지원 사업만큼 주최측이 콘텐츠를 구성하는데 꽤나 유리한 사업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동기이던 문화예술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구성한다는 것은 꽤나 품이 들어가는 일이다. 큰 기관이나 기업이야 전문가를 고용하여 오로지 예술가 발굴에만 신경 쓸 수 있게 하면 모르겠지만, 규모가 작은 기관으로서는 다양한 사업과 업무를 병행하면서 장래 유망한 예술가까지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기회를 노리는 수많은 이들, 수요 적은 공급자들이 넘친다고 봐도 좋은 상황에 지원 공모라는 것만큼 효율적인 사업은 없다. 여기에 부가적인 홍보비용, 관련 업무를 협조할 인력, 그리고 당선자들에 대한 혜택지원이 준비되어 있으면 되는데 이는 속된 표현으로 돈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문화계가 이런 마음으로만 공모를 진행하는 것은 아닐 테다. 나름의 전략과 함께 인프라를 구성하고자 하는 등의 긍정적 미래상은 분명 존재하겠지만, 현실적인 지점에서 공모지원사업은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그헤드랩도 당연히 이러한 지점에서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 바이다. 이러한 장점이 있는 만큼 큰 단점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평가와 선발이 갖춘 정당성이다.
3. 문화예술계에 지원이라는 것은 ‘육성’과 ‘복지’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수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청년예술가나 중•장년예술가 지원프로그램들은 인력자원을 육성 및 보존하고 기회가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차원에서 대상을 규정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경향이고, 현재 운영되는 공모제도 대부분 비슷한 경향을 띄고 있다
육성과 복지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 비약적으로 표현한다면, 육성은 이미 발현하는 가치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고, 복지는 아직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한 투자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두 개념은 상충되는데,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태’ 라는 개념이 너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며 인지도를 쌓아 올리고 있는 예술가가 있을 테고, 아예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체 준비 상태인 예술가가 있다고 하였을 때, 어떤 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가령 인지도가 있고 어느정도 나아가는 이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더 큰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하는가, 혹은 가능성을 발현하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를 주어 어떤 가능성의 상태로 만들어내냐 하는가. 사실 이는 모든 공모, 지원과 선택이라는 것이 가진 딜레마인 것인데, 문화예술의 경우 그 추구하는 목표와 그것에 다가가는 가치 쌓기의 과정이 가시적이거나 획일화되기 어렵다. 애초에 선택된 소수가 혜택을 받는 경쟁적 구조에서 약속할 수 없는 근거는 그만큼 많은 문제와 우려를 가져오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예술적 가치, 그리고 그 값어치를 매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선택의 기준점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시각예술의 경우 타 공연예술 등에 비하면 대중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얻는 게 다소 어렵다 보니 시장의 잣대로 판단하기도 어렵고, 당연히 예술을 기능성으로 논하기도 어렵다. 이 그림이, 이 작가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올 곧이 판단하는 것은 미래를 예지하는 일이며, 그러다 보니 경험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느낌 적인 느낌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 경험자의 경험이란 것도 최적화 되어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리스크들이 동반되다 보니 차라리 사설, 사기업이 진행하는 것에는 문제가 적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차피 주최하는 단체의 제일 득 되는 지점으로 선택을 할 것이니, 디자인적으로 좀더 예쁘거나 작품보다 예술가의 상품성을 본다던가 이러한 일이 발생해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공기관이 운영하는 것이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공기관이 가진 관료적 딜레마는 나중에 얘기해볼 기회가 있더라도, 앞서 말한 리스크들로 인한 평가와 선발의 타당함에 문제제기가 너무 쉬어진다. 무엇보다 기관에서의 공모는 첫째는 공공성을 우선으로 해야 하며, 두번째는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는 사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비유일 수 있겠지만 전임 대통령의 아들인 모 작가의 경우에도 이미 서울문화재단의 공모지원 당선으로 인해 한동안 고충을 치룬 것을 언급할 수 있다. 그가 공모지원을 받은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일로 인하여 서울문화재단이 가졌을 공모 선발에 대한 부담감은 말도 못할 것이다. 또한 예술인 복지재단 프로그램의 과밀화 현상도 언급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300만원을 지원해주는 창작지원금만 하더라도(내가 알기론 이는 최대한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사업이다),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근거는 그저 이미지와 글귀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자료들의 비교이며 심지어 그 300만원을 왜 국민의 세금으로 줘야 하냐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스탠다드 한 가이드라인 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관들이 실제로 문제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그 기관들의 브랜드가 흔들리고 계속하여 사업의 정당성에 상처를 입게 되는 리스크들이다. 기관은 이것을 오로지 감내하는 수밖에 없으며 열 받아서 때려 친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원자의 경우, 경우 앞서 말한 다양성으로 인해 나의 가능성이 평가받는 것 자체에 매우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당락에 의한 기대감과 실망감이 미치는 심리적인 요인이 기본으로 가겠지만, 한편으로 관련된 공모가 필수적인 상황(지원금과 명예라는 지점에서)이라면 나의 탈락은 그만큼 철저하고 정당하며 사유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다시한번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경쟁, 그리고 선발과 지원의 구조임에도 그 목표와 방법이 완벽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아, 서로가 괴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문화예술계의 공모지원 시스템이다.
4.
어쩌다 보니 근래 이런저런 공모사업들에 연관되게 되었다. 피그헤드랩도 지속적으로 공모를 진행하고 있지만 또 내가 속한 기관에서의 공모도 준비하는 바이고, 어쩌다 보니 다른 공모도 살짝 발을 담그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그헤드랩에서의 공모는 마음이라도 편한 편이다. 어차피 독립적인 예산으로 움직이는 지라 나와 피그헤드랩이 추구하는 성격의 예술가를 모집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실제로 부족하거나 아쉬울 수 있는 것은 미리 고지하거나, 최대한 양해를 구해가며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공모지원사업이라 할 수는 없으나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참여 예술가와 함께 전전긍긍하고자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나의 능력 부족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더 이상 해당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물론 꼭 그런 마음으로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속한 기관에서의 공모는 얘기가 다르다. 예산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공공기관인 만큼, 분명 부가적인 지점에서는 피그헤드랩보다 분명 훨씬 나은 상황에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부담감 또한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사례들을 참조하고 훌륭한 취지로 세운 공모 지원 시스템에 혹시나 가해질 공격, 문제로 불거질만한 지점을 방어하는 것 또한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꼭 테러리스트를 막는다는 개념보다는 본 공모에 대한 의심이나 갈등의 여지를 없애는 밑작업과도 같은 것이며, 이것을 구축한다는 것은 결국 나도 본 사업의 방향도 스탠다드 한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심사라는 과정도 그렇다. 대체로 이에 경각심을 갖고 있는 전시공간은 이런 공모지원 사업의 경우 1, 2차의 구분 등을 통해 실물 심사를 겸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심사는 잘해야 A4인쇄물, 혹은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떠있는 이미지와 간략한 정보만을 통해 해당 지원자의 적성과 방향성을 염두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한 때 지원자의 입장을 겪어본 나로서는 그들의 역량이 최대한으로 발현되게끔 더 많은 것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고자 하는 편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효율성을 위해 중요한 정보만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는 제거하는 것이다. 정보를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경쟁의 구도에서는 최대한 공정할 수도 있는 것이니깐.
이러한 과정들의 이유는 결국 본 공모지원 사업을, 나아가 그 사업을 추진하는 기관을 지키고 정당성을 확립하는 목표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좌절감을 가질 밖에 없는 지원자들에게 적어도 의심과 갈등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자 하는 나름의 교육지책일 것이다.
5. 한참 글을 거창하게 썼지만, 그래도 경험적으로 지원자의 입장일 때나, 또 주최측이나 관련자가 되었을 때에도 공모사업의 결과로 인해 크게 앙심을 품고 행동을 취했다는 예술가는 사실 그리 없었던 것 같다. 설령 있더라도 최대한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설득을 하려고 한다. 그러면 대체로 서로 좋게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공모지원 사업이란 게 존재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대부분, 그런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주최측도 심사자들도 노력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고. 계속하여 언급한 것처럼 문화예술계 공모사업이라는 것은 명확히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불운한 경우나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한 경우도 있겠고, 그러다 보니 이런 다양한 경우가 얽혀가며 당락이 결정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지원자 시절에 내가 탈락한 이유를 명확하게 듣고자 하는 이였고, 주최측의 입장에선 명확하게 안내하고자 하는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 나도 이러하니 분명 다른 수많은 공모지원 사업들도 같은 마음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