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시각>_ Time Now
<지금 이시각>, 월간지 형식의 월간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획자 : 오종원, 발행 : 피그헤드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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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12월호 10월호 9월호 8월호 7월호 6월호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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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시각> 2023년 5월호, 참여필진 : 김유주, 석민정, 오종원, 엄제현, 이은우, 이채연
신규 참가자 및 게스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오 종 원
문화예술인력 / 피그헤드랩 운영
포럼이 끝나고 난 뒤

지난 2023년 4월 23일, 성동문화포럼에 초청을 받아 짧게 발제를 하였다. 해당 원고는 지금이시각 4월호에 게시하였으며 간단히 피그헤드랩의 설립 당시의 상황과 진행하는 프로그램, 지향하는 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성동문화포럼은 스마트 문화도시로 발전해 나가고자 하는 성동구와 성동구 안에 문화자원을 한데 모으고자 하는 문화재단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발제자는 일단 문화공간 피그헤드랩 대표인 나부터 하여 성동구에서 터를 잡고 문화 콘 텐츠를 사업화하고 있는 기획자, 자영업자, 스타트업 등 다양하였다. 참관으로는 성동문화재단 분들과 인근 대학의 교수, 예술인복지재단 및 몇몇 기관에서 참여하였다. 포럼에서 발제 한 내역은 이미 지난달에 기고했으니 그렇다 치고, 본문은 해당 포럼에 참여하고 드는 생각들을 편하게 써보는 것이다.
문화 콘텐츠라는 것이 지역의 훌륭한 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일단 유명한 관광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딱 눈만 감아도 유럽 의 다양한 국가와 도시들의 환상적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내 경우엔 브리티쉬 뮤지엄이 그렇게 좋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곳을 며칠 잡고 보고싶다고 느껴질 정도로. 또 테이트나 루브르, 퐁피듀 같은 곳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파리의 경우 에는 뮤지엄 패스가 너무 비싸서 날짜를 수기로 조작해가며 본 기억도 난다. 입장 료도 결코 싸지 않았지만, 방문하면서 도록이나 굿즈도 구매하고 인근의 특색 있 는 식당이나 관광지도 다니게 된다. 거기다 나 혼자 뿐이겠는가. 수많은 인파들이 이미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몇 시간이 될 수 있는 줄을 서고 있는 것이다. ‘문화’라 는 것을 성공적으로 ‘운영’해온다면 분명 그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는 것을 익숙한 환상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꼭 외국만 있겠는가. 국내를 보아도 강남스타일의 강남, 전통적 K미디어의 강자 홍대와 명동도 있겠다. 별도 유별난 관광자원이 없었다는 여수가 <여수 밤바다>로 일약 히트를 쳤다는 얘기도 꽤 된 얘기이다. 또 젠트리피케이션이네 무엇이네 하여도 결국엔 익선동이나 을지로 등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문화라는 것이 일종의 브랜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근래에는 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사업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앞선 발 제의 상황만 돌이켜봐도 분위기 좋은 인테리어와 예술의 영역이 깃든 카페나 주점 은 물론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 메타버스 콘텐츠, 문화 소비라는 지점에서 활용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콘텐츠까지. 이제는 정보를 교류하고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방식이 사업이 되고 세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동문화포럼의 목표인 스마트 문화도시 성동도, 이러한 산업구조 를 확대하고 브랜드화 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실제로 성동구의 경우 전통적인 문화 소비재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 성수동, 건대입구와 더불어 젊은 이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인 속칭 핫플레이스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 다. 강북과 강남, 강동에서 모두 접근하기 좋다는 것도 있을 테고, 홍대가 잃어버린 젊음의 거리라는 상징을 탐내는 전통적인 강자랄까. 요즘은 다소 주춤한 느낌 이 있지만, 대림창고와 에스팩토리 등 오래된 대형창고를 리모델링한 대형 컨벤션 홀 및 문화공간을 겸한 카페 등이 조성되어,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소비환경이 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속칭 인스타 감성이 라는 것이 유래한 것도 이쯤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젊음이 모이고 사람들이 오가며 불어넣는 생기는 어떠한 의미와 상관관계로든 해당 지역의 큰 도움을 보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 지역이 자체적으로 문화 콘텐츠를 운영하고 형성시켜 성공적 으로 유치하는 경우는 그리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관광지의 경우에도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누적된 것이 발아한 것이지(물론 여수 는 모르겠다), 문화도시 XX라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긴 장고의 시간을 가지며 상징성을 띄는 곳이 과연 몇 곳이나 될까. 얼추 생각해봐도 몇 곳이 되지 않는다.
다시 브랜드라는 관념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발성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 다. 누군가 유명 브랜드의 가치는 역사라고 하던데, 문화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하나의 아이템으로도 대박을 치는 경우는 분명히 있고 또 많을 것이나, 그 대박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그렇지 않다면 금방 소멸해버릴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욱이 정보와 미디어가 넘쳐나는 지금 시대, 수많은 유행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만 해도 불닭볶음면 첼린지, 아이스버킷 챌린지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아이스버킷 챌린지 이후 한 때 는 SNS를 통해 서로를 칭하면서 어떤 도전을 이어가는 ‘챌린지’ 놀이 같은 것이 인 기를 끌기도 했었다. 이것들 모두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부가 콘텐츠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는 없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만큼은 인기가 떨어 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문화라는 것은 뒷심이 매우 필요하다.
한편으로, 그 뒷심을 계속 채워 넣을 수 있다면 어떻게 든 그것은 브랜드로서 유지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가령 을지로의 모 호프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엔 주 활동지가 근처이다 보니 을지로 맥주골목(혹은 노가리 골목)에 점차 사람이 넘쳐나는 것을 몇 년에 걸쳐 지켜보게 되었다. 사람이급증하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고 이윽고 대기열이 30분이고 1시간이고 늘어나는 경우를 보게 되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맥주거리는 을지로 산업구역 한 가운데 다소 허름한 건물 들 사이에서 저렴한 안주와 시원한 맥주 한잔 하는 것이 그 기원이었다. 그때는 맥 주거리라는 명칭도 없었을 것이다. 특별한 메뉴가 존재했던 것도, 뭔가 화려한 볼 거리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청계천 데이트를 하다 길가에서 시원하게 맥 주한잔 할 수 있는,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메리트 정도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메리트가 SNS 등의 붐을 타고 수많은 인파를 몰리게 만든 것이다. 아마 근래의 소비문화, 그리고 그것을 SNS에 올리는 풍조가 소확행이라는 유행어에서 시작하여 ‘화려하진 않지만 나만의 숨겨진 비밀공간’같은 느낌이 주력으로 떠오르며 그 덕을 본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오밀조밀하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감추고 있을 것 같은(동시에 재개발에 항상 난황을 겪는) 을지로라는 동네는 대체로 딱 맞 아 떨어진 것 같다. 적어도 문래동보다 더 밝기도 하고. 직장인, 인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숨겨진 쉼터와도 같았던 그곳은 이윽고 ‘을지로 노상에서 맥주를 먹기 위한 경험을 사려는 이들’로 메어 터지게 되는 것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 을지로 맥주골목이라는 문화적 브랜드가 독점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모 호프가 이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인근의 호프들을 매수해 나갔고 결국 그 거리에 있는 대부분의 맥주집을 자신들의 분점으로 만들고 말았다. 특히 논란이었던 것은 을지로 정취에 상당히 이바지했다고 알려진 OB 베어를 공격적인 방식을 통해 없애 버리게 된 사건인데, 사실상 젠트리피케이션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OB베어가 백년가게로 선정도 되고 을지로 분위기 형성에 이바지한 지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만큼, 그 목을 꺾은 것이 과연 거시적으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을지로 맥주거리가 아닌 X선호프 거리로 성공적으로 바꾼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조금 불친절한 종업원과 특색 없는 메뉴, 위생적이라 하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밀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날이 빠르게 풀리고 있는 요즘 같은 날 에는 다소 늘기도 하였다. 물론 앞으로 을지로의 다른 맥주집, 다른 유행거리가 생 길 수도 있겠고 해당 호프의 독과점이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물론 벌 만큼 벌었겠지만) 그럼에도 힘의 논리가 개입되면서 해당 브랜드가 독점화되고 또 자본화 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씁쓸하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끊임없이 보인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익선동의 경우가 그리하였지 않는가. 익선동이 언급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6~7년 전이다. 갑자기 집주인이 바뀌며 쫓겨났다는 공방이나 식당의 이야기 같은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낙원상가 옆으로 포차거리와 갈매기살 집이 맛있다 정도였던 익선동이 지금의 핫플레이스가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이지? 무엇이 사람들 의 발길을 끈 것이지? 생각해보면 익선동이라는 지역이 가진 전통이나 고유한 특 색이 관심을 끈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한옥과 같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고저택이 있더라에서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익선동을 보면 꼭 그것도 아니다. 지붕 정도는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화려하고 다양한 특색으로 개조하여 아예 실내정 원을 만들어 놓은 가게를 본 적도 있다. 그 나름에서 맛집도 있고 멋집도 있고 웨 이팅이 긴 어떤 가게가 있던 간에 그것은 꼭 ‘익선동이어서 가능’한 체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조차 지역적 브랜드가 되어, 그 좁고 인파 많은 골목을 거니는 경험을 사기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분명 6~7년 전의 익선동이 아닌 익선동이라는 신규 브랜드는 매우 효과적으로 잘 자리잡은 듯싶다. 얼핏 풍문에 익선동 개발 세력에 예술계 출신 젊은 재벌집 며느리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보면 마냥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제 개발이라는 것은, 땅값을 올리기 위한 방법에 자본을 투자하여 환경 을 조성하는 것은 전부터 있어왔지만 그것이 문화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까지 조정 한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무력함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나와 비슷할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적인 어떤 감정선과 달리 지자체의 입장은 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단기간에 효율적인 효과를 발휘 하는 콘텐츠를 지자체는 바라온 것 같고, 또 나 같아도 결과를 따지자면 이러한 방 식을 더 찬성할 것이다. 오히려 전통적 문화예술, 얼핏 순수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 는 영역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은 정말 당장의 이득도, 먼 미래의 수익성도 기대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중에 하나가 잭팟이 터져 외부의 관광객을 유입시키고 부가적 일자리가 늘며 세수를 늘릴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강남에 위치한 하이브가 아니고서, 또 홍대에 위치한 클럽과 놀이문화의 규모가 아니고서 어디 쉬운 일인가. 5년 10년이면 휙휙 바뀌는 정책과 자리의 순 환 속에서 문화예술의 가져올 막연한 미래를 묵묵히 응원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10의 9은 이해못할 컨템포러리, 극 소수의 엘리트주의의 문화 콘텐츠, 보편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마이너한 장르들까지 국가의 세금과 지원, 하다못해 관심이라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아무튼 처음 성동문화포럼으로 돌아가, 그렇게 발제들을 마치고 라운드테이블을 갖는 자리에서 진행자는 준비한듯 다음과 같은 말을 꺼냈다. “이런 문화 공간들이 계속 유치되고 발전해 나가려면 역시 지속적인 지역의 지원 같은 것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나는 대충 이런 느낌으로 답변하였다. “직접지원만이 해결은 아닐 것 이라 본다. 이것이 지속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문 제는 이것이 매우 긴 인내의 시간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사(포럼)을 준비하는 실무자들은 몇 년 이상 이러한 것들을 전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계약직인 경우도 많고) 꼭 월세 같은 지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관여하게 되는 이들에게 많은 힘을 밀어줘야 한다고.” 그리고 대체로 다른 발제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는 포럼이 너무 길어져 빈자리가 늘어나는 가운데 공허하게 울리고 적당히 마무리되기는 하였다. 결국 지자체가 앞장서서 이런 문화적 환경을 조성할 터이니 우릴 믿고 따라와보라고. 해당 포럼에 모인 발제자들은 크게 성동구에 어떤 혜택을 받은 사람이 막상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지자체의 이념은 이념대로 따로 가고 우리의 신념은 신념대로 따로 가는 것은 아닐까. 다만 찰나라도 서로의 이득관계가 부합이 될 때, 그곳의 문화예술은 찰나의 발전이라도 가지는 것이라 믿을 수밖에.

김 유 주
쉬어가는 사람
여행 권태기
여행에도 권태기는 있다. 내 경우에는 여행이 ‘일상’처럼 느껴질 때가 그렇다. 종종 현생이 지루할 때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여행이 일상처럼 느껴질 때 바 로 떠나온 일상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 여행 권태기는 일상의 권태기와 다르지 않다. 여행에 문제가 있어서 권태기가 오는 것인지 권태기가 와서 여행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것이 특히 닮았다.
나는 지금 두 달 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네팔에 와 있다. 네팔은 15일의 비자를 사고 들어왔으니 시간이 많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어서 떠나고 싶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일상에서 권태기가 올 때처럼 이 권태로움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따져보기 시작한다.
첫 번째, 몸이 아파서일까? 인도에서 네팔로 들어가는 가장 저렴한 루트를 찾다보 니 24시간을 들여서 육로이동을 했다. 씻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음 편히 싸지도 못하면서 앉아서 24시간을 온 셈이다. 온전하지 못한 에어컨 탓에 땀 에 젖었다가 추위에 떨었다가를 반복하며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네팔에 도착해 첫 번째 목적지인 카트만두까지 또 지프차로 이동했는데 심각한 먼지로 목이 찢어 질 듯 아프고 코가 시큰했다. 네팔에 온지 12일이 되었으니 오늘로 12일 째 앓고 있는 것이다. 몸이 아프니 하루가 고달프고 힘든 게 당연하지.
두 번째, 예상과 다른 모습에 실망한 것일까? 네팔은 인도보다 더 사회적 기반이 좋지 않고 모든 것이 불편할 것이라 예상했다. 개발이 덜 된, 아직 서구화되지 않 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나라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하는 여행을 상상하며 설렘 과 걱정 가득한 기대를 했었다. 째깍째깍 재촉하는 시간에 떠밀리는 그런 바쁜 현대사회 말고 흙먼지조차 여유롭고 느긋하게 날리는 시골에서 반짝이는 눈을 빛내 며 맨발로 수줍게 걸어와 인사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눠줄 사탕도 챙겨왔다. 그런데 웬걸? 네팔에 들어서서 눈앞에 펼쳐진 건 예상과 다른 현대적인 모습이었다. 여행하며 종종 그 나라 땅을 밟기 전에 했던 ‘예상’이라는 것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가 있긴 하지만 네팔은 부끄러움을 넘어서 나의 무지에 놀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이것은 나의 무지와 오만이었음을 고백한 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내가 상상하던 네팔과 전혀 다른 네팔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 여행의 목적과 계획을 뿌리 채 다시 세워야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뭘 들었길래 나는 이렇게 큰 착각을 하고 온 것이지? 하루 이틀 여행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여행지에 가기 전에 반드시 공부를 하고 가야 한다고 핸드폰을 붙들고 온갖 정보를 찾아보던 나는 어디가고 벌써 이렇게 헤이해 진 건가? 나 자신에게 이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의 오만이 여행을 망친 것 같아 자책도 했다. 혹시 그래서 의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세 번째, 사람이다. 여행하면서 가장 좋은 순간은 사람에게서 온다. 그런데 하필 힘들게 국경을 넘자마자 사기를 당했다. 인도에서 네팔로 국경을 넘을 때 릭샤(택시)를 타고 이동할 경우 요금이 20루피인데 릭샤 기사들이 그렇게 바가지를 씌운 다고 들었다. 우리가 넘을 국경은 한국에는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국경은 어떻게든 넘겠지만 국경을 넘어 도시로 이동할 방법을 못 찾고 있었다. 그런데 릭샤 기사가 출입국 사무소를 지나 카트만두로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150루피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마침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인도 가족이 친절하게 잡 아준 릭샤라서 우리는 큰 의심 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릭샤에 올랐다. 출 국심사를 하는데 이유 없이 심사가 지체됐다. 출국심사가 끝나서 나가니 릭샤기사는 우리에게 오래 기다렸으니 300루피를 달라고 했다. 기가 찼다. ‘그건 절대 로 안 돼. 넌 이미 우리를 정류장까지 150루피에 데려다주기로 약속했잖아? 출입 국 과정은 너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약속을 지켜.’ 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릭샤 에 올랐다. 릭샤 기사는 이제 동정에 호소했다. 이렇게 하면 자기가 남는 게 없다 는 것이었다. “어쩌라고? 난 150루피 이상 줄 수 없고, 넌 우리를 정류장에 내려 줘야 해.” 라고 하고 네팔 입국허가를 받으러 출입국 사무소에 들어갔다. 입국심사 를 마쳤는데 뒤를 보니 릭샤기사가 앉아 있다. 그리고 네팔 출입국 담당자에게 또 뭐라고 하소연하듯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담당자가 “저 릭샤기사가 너희한 테 500루피 달라고 영어로 말 좀 해달라는데?” 라고 영어로 이야기해줬다.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담당자는 “그냥 니가 주고 싶은 만큼만 주고 기사를 돌려보내. 어차피 카트만두 가는 버스정류장은 여기서 걸어서 2분밖에 안 걸리거든.” 이라 고 친절한 얼굴로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더 화가 났다. 인도 여행 두 달 동안 릭샤 사기를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당하다니. 나는 그래도 약속한 돈이 니 150루피를 쥐어주며 “고 홈!!!! 이거 갖고 집에 가버려 이 친구야”라고 혼내듯 그 기사를 보냈다. 내가 분해하자 마침 옆에 있던 일본인과 담당자는 웃으며 “잘했 어. 어차피 저 기사는 돈을 번거야. 원래 비용은 정류장까지 20루피거든” 라고 말 했다. 출국심사 때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도 릭샤기사가 담당자와 짜고 릭샤비를 더 받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이면서. 이거.. 분위기는 위로해주는 분 위기인데 어째 듣고 보니 기분이 더 안 좋다.. ‘그래, 인심 후한 한국인인거다. 절대 멍청한 게 아니다, 절대.’ 이렇게 네팔 여행을 시작한 뒤로 같은 물 한 병을 살 때도 바코드가 아닌 우리 외모를 스캔하고서는 가게마다 다른 금액을 부르질 않나, 호 스텔 사장은 우리가 부킹X컴을 통해 저렴하게 예약했다고 불쾌하게 굴지를 않나. 좀처럼 좋은 인상을 갖기가 어려운 일들만 일어나니 이 나라에 정이 가겠어?
네 번째,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일까? 이전에 태국을 여행하면서 친구와 돈쓰는 백 수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태국은 물가가 싼 데다 맛있는 것들이 많아서 저렴한 음식들로만 먹어도 사치를 부리는 기분에 괜히 신이 났었 다. 네팔에 대한 무지로 우리는 당연히 네팔이 물가가 저렴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아니, 착각했었다. 바로 다음 여행지가 유럽이라서 안 그래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었는데, 네팔에 와서는 더 졸라매야했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지 않아서 이동 하는 비용도 많이 드는데다가 대부분의 관광지 입장료도 비싸다. 그리고 음식 값 은 물론 대부분의 공산품도 내 예상보다 훨씬 비싸다. 나도 이 나라가 부국해지고 빈부격차가 사라져 구걸하는 사람도 없고 환경오염도 없는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 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 예산으로는 15일도 버거웠다. 저예산 배낭여행을 하면서 대부분의 나라를 떠날 때마다 “다음에는 돈 많이 들고 돈 쓰러 와서 팁도 팍팍 주 고 기부도 많이 하자.”라고 친구와 다짐했었다. 저예산 배낭여행은 장점도 있지만 나름의 단점도 있고 한계도 크다. 몸이 안 좋아서 입맛도 없는데 메뉴판에 가격은 없던 입맛도 떨어트렸다. 이러니 네팔에 있는 내내 살이 빠지는 게 당연하지. 이쯤 생각하다보면 내가 지금 스무 번째까지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이다. “아, 권태기가 맞구나!” 그러면 나머지 열여섯 개의 불평은 더 이상 떠올리지 않게 된다. 대신 몇 번 ‘집에 가고 싶 다..’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거나 미화된 한국에서의 일상을 떠올린다. 일 상에 불만이 가득해 떠나고 싶었던 나는 떠나와서야 배운다. 권태란 자연스러운 것이고, 현실로부터의 도피는 살아있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디로 도피하든 그곳은 나의 일상이 되는 것이고 권태는 일상의 한 부분이니까. 어디에서든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것이다. 매일이 새로울 수는 없고 매일이 즐겁기만 할 수도 없다. 현실을 떠난다고 해도 유토피아는 없다. 그곳은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현실에서 나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임을 생각해본다. 그 유토피아가 어릴 때 꿈꾸던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반복되는 매일을 열심히 가꿔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떠나와서야 배운다.



이 채 연
창작가 /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주부
갈현동에서 본 장미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충북 진천. 이 곳으로 오기 전에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한 3년반쯤 살았다. 그런데 그 시간보다는 더 길게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육아의 최절정기였고, 그 곳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런 것 같다. 육아도 힘들었고, 고민도 많았다. 아이의 나이는 5세에서 8세 사 이. 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여름 방학 까지다. 지금은 12살이다. 원래는 서울의 다른 동네에 살았는데 영유아 어린이집을 졸업하면서 다음 보육기관으로 고른 곳 이 갈현동에 있어서 이사 오게 되었다. 보통 별 다른 사정이 없으면 집 근처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고심해서 고르고 고른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서 이사를 감행했다. 나름 열혈 부모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어린이집은 공동육아 협동조합으로 이전 어린이집과는 다른 점이 많다. 부모가 협동 조합을 이루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서로의 육아를 돕고 나누는 것이다. 공동으로 육아를 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교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의 인간관계는 대체로 심플했다. 그렇던 나의 일상은 공동육아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가 늘어나고, 어울리고, 부딪치고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아 힘들기도 했었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고, 각종 행사로 바쁘게 되면서 단조로운 일상은 생기가 도는 것 같아 좋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작업(미술)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부터 결혼전까지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조심스럽게 깨작되는 작업이었다면, 그것보다는 더 열정을 품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로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업에 대한 의지와 그에 대한 능력, 늦깎이 작업의 어려움, 집안 환경, 등등을 되묻고 되물어도 답이 없는 자문자답의 나날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새로운 육아의 장이 되는 곳이고, 개인적으로는 작업을 다시 시작 한 곳이다. 전환이 되었던 동네다.
가끔 그 동네에서의 장면이 기억난다.
좋은 전시를 본 후, 자극받아서 상기되어 들뜨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내가 초라 해 보여서 서글픈 날 이였나? 아무튼 봄과 여름 사이 어느 날, 늦은 오후,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인 연신내역에서 내렸다. 6번출구로 향한다. 출구 계단을 점점 올라 갈수록, 아직 남은 오후의 햇살이 제법 강한 것을 느꼈다. ‘아직 낮이네. 늦게 도착하지는 않았네.’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출구 를 나섰다. 각종 포장마차와 호객행위를 지나치고, 떡볶이, 도너츠 등등의 좋아하 는 간식거리의 유혹도 뿌리 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걸어가기가 힘들어서,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마을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갈현동 비탈길 끄트머리에 있는 아이의 어린이집.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등하교 차량 일명 노랑버스가 없다. 부모가 직접 아이의 등하교를 해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은 아이와 길을 같이 걷는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귀찮았다! 다시 그날의 하원길로 돌아와서,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과 아이들 소리에 시끌시끌한 어린이집,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떡볶이, 치킨, 냉면집이 촤라락~ 생각난다. 그리고 근처 아파트 화단의 청량한 빛을 내뿜는 붉은 장미가 영화 엔딩 컷처럼 떠오른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장미가 한창인 5월.

어린이집 때가 생각이 나서 찾아본 그림. 어린이집 20주년 표지를 그렸다. 20주 년 책자 표지로 사용되었다. 그림은 같은 학부모분이 구입했고, 판매수입은 어린 이집 발전 기금에 기부했다.
선생님이 주신 아이들 사진을 참고 그렸고, 그림에 우리 아들은 없다. 그릴때는 다 내 아이이고, 우리 아이다 생각하고 그렸는데, 지나고 보니 아들을 넣지 못한 것이 아쉽다. 참고로 그림을 구입하신 분의 아이는 그림 속에 있다.
p.s
-지금 이시각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어린이집 20주년 그림처럼, 20주년 기념 그 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농담이고, 20년 뒤에도 건강하게 작업하는 롱런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
모두들 작업을 재미나게 잘 헤쳐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이 은 우
그림 그리는 사람 / 본업과 부업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 중
초록 테이블 위 한 잔의 커피
돈만 있어도 못살지만
돈 없으면 못살아
카페에 있으며 귓가에 들려온 문장이다. 돈이란게 참 사람을 옹졸하게도, 비참하 게도, 행복?하게도 한다.
20대때의 대화, 30대때의 대화, 남자들의 대화, 여자들의 대화, 학생들의 대화, 직장인들의 대화, 친구들과의 대화, 가족과의 대화, 동생과의 대화 등 여러 집단에 들어갈 때마다 달라지고 변화하는 주제들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 흥미로움 속에서 물론 가끔씩, 여전히 변두리에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언제쯤 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회사, 자동차, 부동산, 집, 전세, 월세, 매매 등 요즘의 대화 속 단어들이 기존과는 확연히 달라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공간을 하나씩 꾸려가면서도 느낀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것, 나만의 어떤 것들.. 별거 없는 세상 속에서 물건이든 어떤 일이든간에 나 자신을 더 확고하게 정의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런것을 좋아해, 이 런 일을 좋아해 등… 검정색 책상, 녹차빛 커튼 등 내 스타일대로의 것들을 구매하 고 집에 설치해보았다. 그러나 합이 안됨을 몸소 체험한다. 이러한 사실에 사소하 게 망연자실 해보기도 하고다른 것을 구매할걸 하는 후회도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적당히 만족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거니까 됐어!’라고 되뇌인다.
오늘도 어떤 카페에 왔는데 여러모로 나의 마음을 울렸다. 가구 배치나 소품들을 쓸데없이 고급스럽거나 소위 사진 잘 찍히는 느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신경 쓸 곳만 제대로 신경 쓰고 러프하게 치고 잘빠진 점. 불필요한 제조 소비를 줄인다 는 슬로건도 마음에 들고 중고제품을 이용하여 인테리어를 한 것도 참 마음에 든 다. 러프함 속에서 빛나는 편안함 감각. 소비에 있어서 매번 피로감을 느꼈던 이유 도 고가의 제품들, 비싼 것이 결국 오래간다 라는 말들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간 나 도 이러한 느낌으로 공간이든 작품이든 더 만들어보고 싶었다. 낮의 햇살을 즐기며 사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다시금 되찾아보자. 그러면 안보이던 것들도 다시 들어오겠지.
곡물 커피 한 잔으로 하루의 시작이 참 즐거웠다.


석 민 정
삼십대 / 문화예술인 / 교습소운영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_8
ep. 23 사실은 얘랑 사겨요.
대학시절부터 이리저리 붙어다닌 탓에 부모님들도 자주 봬었다.
추리닝을 입고 이사를 도우며 먼지투성이 얼굴로 밥도 얻어먹고
다정하게 물으시는 질문에 천진난만하고 장난스러운 답을 하였다.
보수적인 나의 아빠는 대학시절 장발의 그 애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하셨다.
우리는 친구인듯 연인인듯 우리조차 헷갈렸기 때문에
퍽 연인인 척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양쪽 부모님께도 참 편하게 행동했다.
그 애의 부모님과 나의 엄마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인 것을 아시지만
나의 아빠는 아직도 우리가 그냥 소꿉친구인줄로만 아셨다.
예술하는것을 딴따라라고 생각하는 양반에게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웠던 이유도 있었다.
우리가 서른이 넘으니 나는 그 애의, 그 애는 나의 부모님을 뵙는것을 어려워하였다.
괜히 어른인 척 하는거지-
“부모님 뵙자”
동거를 시작하기 전, 우리 부모님을 먼저 뵙기로 하고
아울렛에 들러 겨울잠바를 하나 샀다.
내 동네의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을 골라 예약했다.
나는 식당 룸에 앉아 나의 엄마아빠를 기다리며 덜덜 떨었다.
‘우린 아직 어린애들이란 말이야’
내 엄마아빠를 보는데 나도 이렇게 떨리는 걸
그 애는 오죽할까 하고 쳐다보니 사색이 되었다.
엄마아빠가 룸에 들어오시고,
나는 말이 많아지고,
민망한 엄마도 말이 많아지셨다.
이런자리를 불편해하시는 아빠는 줄곧 무표정이었고
그 애는 거의 무릎을 꿇고 있다.
“아버님 어머님 이것 선물이에요”
11월이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곤색 겨울잠바를 꺼내니, 입어보시지 않고 무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신다.
마음에 드신다는 거다.
리액션 좋은 엄마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착용해보시고
이리 저리 돌아보시기까지 하신다.
발랄한 나와 엄마의 말소리만 들리는 와중에
한정식이 한 상 차려졌고,
어색한 대화들이 오가며 식사를 마쳤다.
저녁 6시 4명 예약, 6시 30분 식사 끝이었다.
‘이게 맞는건가…?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집으로 가. 방어 사줄게.”
아빠의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집안을 치우지 못하고 나왔다는 엄마는 절대 안된다며 손사래쳤지만
무대포 아빠는 이미 차에 올라타셨다.
우리는 어리둥절 집으로 끌려갔다.
퍽 웃기는 제안이었다.
아빠는 근처 횟집에서 방어를 포장했고
소주 몇병을 샀다.
그리곤 거실에서 티비를 보셨다.
남은 우리와 엄마는 거실에 작은 상을 펴놓고 방어와 소주를 마셨다.
그쯤 나는 긴장이 다 풀려 철 없는 작은딸로 돌아와있었고
그 애도 나름 긴장이 풀려 소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수다를 떨고
아빠는 티비를 보고
비싼 한정식은 30분만에 먹고
집에 와서 회와 소주를 먹는게 참.
그래 이게 우리지.
이거 꽤 좋은 신호탄인거 맞지..?
Ep. 24 너와 나의 집
한 달정도 발품파니 우리에게도 기회는 왔다.
막 계약이 취소된 집을 급하게 보러오라는 부동산 아줌마의 전화를 받고
일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방 세 개에 작은 거실도 있는 준수한 집.
남의 집 위에 지어진 조금은 독특한 독채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 평의 작은 마당이 있고 커다란 베란다가 있었다.
더 볼것도 없었다. 이집이 마지막이다.
이 집이 아니면 우린 반지하나 허리 못펴는 화장실이 딸린 집으로 가야할 것이 뻔했다.
그 애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고, 내가 모은 돈을 합하여 전세계약을 했다.
2-3년 뒤엔 우리도 아파트로 이사가자.
남들처럼 싹 바꾸진 못해도, 소파와 침대는 사자.
우리가 자취시절 내내 끌고다니던 낡은 가구들을 버리고
물건을 비워냈다.
사실 버릴것도 없었고 가져갈 것도 없었다.
첫 동거때 구매한 50만원짜리 냉장고와
6키로 작은 통돌이 세탁기를 가져와 넣었다.
(월세방이지만)네 집, 내 집은 있었는데
우리집은 처음이었다.
작은평수의 구옥이긴 하지만
길었던 자취생활 끝에 드디어 방 세 개짜리 집으로.
많이컸다 우리.
Ep. 25 끝을 보려고 시작한 여행
11년째 연애중.
가족보다 더 가까운 그 애와 새 집에 이사 오자마자
집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는 침울 그 자체였다.
또 물이야….
내 고양이는 또 속없이 구경하고
물은 장판위에 고여간다.
불길한데..?
예상치 못한 지출이었다.
급하게 제습기를 구매했다.
큰 맘먹고 성능좋은 제습기를 구비하니 새는 물은 금방 잡혔지만
비 많이 온다는 이번 장마가 걱정이다.
문제와 해결책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인가. 너와 나로 남을 것인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1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남겼나.
그 애와 나는 이상 할 정도로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세상에 내던져진 하나의 ‘알’ 같았다.
미숙한 우리는 알을 깨려고, 깨려고
알을 깨어서 날개를 펼치고 각자의 하늘로 날아가려고 해도
막상 금이가는 것을 보면 두려움이 더 커져.
우리 조금만 더 있자 지금 이대로-
특별할 것 같았던 나의 30대는 평범함을 향해 가고 있었고.
동화같을 것 같았던 너와 나의 스토리는 여느 연인들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니
우리가 어디까지 흘러갈지.
자. 이제 클라이막스다.
예고편만 흥미진진했던 11년의 장편영화.
마지막 반전이냐, 늘 그렇듯 진부한 해피엔딩이냐.
끝까지 가보자.
우리 결혼 할 수 있을까 끝.


엄 제 현
비평웹진 퐁 운영자
울어버렸습니다
모종의 결탁으로 <지금 이 시각>에 광주비엔날레의 글을 싣기로 하고 그곳을 향할 무렵. 머릿속은 비엔날레가 오늘날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변혁적 의의를 이야기할지, 아니면 최근 생태주의에 입각해 열린 부산과 제주의 비엔날레를 한꺼번에 비교하는 글을 써볼지 셈하고 있었다. 일정을 함께할 동료들과 만나서 전시를 볼 때는 카셀과 비교하는 텍스트를 내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숙경 감독의 큐레이션은 미학화된 카셀(도큐멘타 15)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원시주의적인 작업들을 한데 모았으며, 15가 해체한 작가주의와 작품으로서의 개별성을 보존한 채 각 작품이 있어야 할 자리를 완벽하게 마련했다. 작품을 비평하는 바에 대해선 시들해진 지 오래였고, 전시장을 감도는 미세한 기류를 잡아채는 것이 오늘날 큐레이터 중심으로 개편된 전시 비평의 새로운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작품들의 용병술에 관해 집중하며 전시를 보고 있던 차였다. 그렇지만 3층 한켠에 구획된 블랙 큐브에서 마주한 아서 자파의 <LOML>을 보고 나서 그만 울어버렸고, 아마도 작업을 보고 처음 흘렸을 이 눈물을 찍어먹으라고 권해야겠단 마음이 생겼다.
<LOML>은 평소 흑인의 신체성을 이미지에 강렬하게 투사해 통각을 건드리는 듯한 아찔함을 과시하던 기존의 작법과 달리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지지난 광주비엔날레에서 출품했던 <불가시성>의 네거티브 필름과도 같은 어둠으로 점철되어 있다. 작가의 친인인 그레그 테이트의 사망을 애도하는 영상은 사랑하던 이를 떠나보내는 송가가 되어 저 오래된 과거에 우리가 죽은 이를 애도했을 방식으로 데려간다. 극단적 반反재현의 어둠과 희미한 빛이 스멀거리는 영상과 하울링과 유사하게 공명하는 사운드트랙의 포갬은 비탄에 잠긴 정서를 반향시켰고, 망막에 반사되어 상 맺기 위한 이미지가 공백을 현시함으로써 고대의 시공간을 끌어당겼을 때 관객은 동굴시대 인류가 참배했을 사자의 위령제에 예속되었다. 불식간에 빨려 들어간 제의 속에서, 나는 그동안 유예해온 시간들을 속절없이 마주했다.
한 인간이 살면서 직접 목도하는 죽음은 몇이나 될까? 죽음마저 절차에 의해 예외 없이 처리되는 세상에서 송장을 볼 기회는 기껏해야 친인척의 장례 외에 몇 안될 것이다.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나는 간호사 면허를 취득하고 몇 년간 요양병원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응급현장으로 출동하는 구급대원의 삶을 살고 있다. 요양병원에 있을 당시에 별명은 저승사자였을 정도로 근무 번에 사망자가 많아 꽤나 자주 시체를 접했는데, 당장 유족에게 고인은 작별의 대상이었겠으나 내게는 병원 침상을 비울 절차로 직결되는 무언가로 간주됐다. 구급대원이 된 지금도 법률에 따라 심정지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기에 ‘사망-이후’는 새삼 무관한 영역이다. 수없이 마주하는 죽음들에 일일이 의미를 부과하긴 어렵고, 절차에 따라 죽음을 밀봉하고 수탁하는 일에 충실한 삶을 산다.
요양병원은 대개 터미널(말기의) 환자들이 머물기에 나는 그곳이 이승보단 저승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반면 구급대원이 되고 나서는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야 하는 업무를 맡았기에 이승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세상은 이런 감상에 상관없이 죽음을 소분하여 구급차-병원-장례식장-화장터-납골당에서 행해야 할 감정의 분업을 부과한다. 적법하게 죽음을 처리할 망자의 컨베이어벨트에서 내가 속한 구간은 일말의 동요 없이 인간을 무사심한 대상으로 여길 것을 종용한다. 환자의 몸은 접촉과 교류를 촉진하는 인격이 아닌, 매뉴얼에 기재된 처치를 적용할, 단지 몇 가지의 활력징후와 EKG 리듬으로 변형된다. 특히 명백한 사망자는 구급대의 소관이 아니기에 어떤 현장이든 유보 처리하고 다음 출동을 위해 빠르게 철수하는 내게 <LOML>은 귀소를 차단한 채 그 이후의 풍경으로 들이닥쳤다.
한 인간을 배웅하는 데엔 어쩌면 평생이 걸린다. 그것은 고되고 오랜 상속과 회복의 문제다. 아마도 내가 흘린 눈물이 지독히 짰다면 이 비통한 사실을 새삼 상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긴 동행을 함께하기에는 서로 너무 멀어져버린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피그헤드랩
www.pigheadlab.com
피그헤드랩 23년 5월 소식
이혜진 개인전 <그래도 자라나고>(2023.04.22-05.06)
다이나믹 듀오라는 힙합 그룹의 노래 중에는 '어머니의 된장국'(2008)이라는 노 래가 있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어머니, 지치고 삭막한 세상살이에 어머니가 차려 주신 밥상을 그리워하는 심플한 노래이다. 나온지 좀 된 노래임에도 불구하 고 간간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을 보면 1인 가구의 급증이 원인이거나 삶의 피로감 은 줄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문화예술을 업으로 하는 나도 언젠가부터 그런 것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부터 좋은 전시라고 보러 가더라도 약간의 두통이나 무감각해지는 경험을 하고는 하는데, 뭔가 더 분석하고 설명을 들어가면서 봐야 한다는 직업적 의식은 피로감이라 해야 할까, 묘한 건조함과 권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내가 이혜진 작가(이하 작가)를 알게 된 것은 10년이 넘는다. 그 시 간들을 거쳐 내 전시장에 작가를 초대하고 전시를 연다는 것은 작품이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한 사람이 창작을 계속 붙잡고 지속하려는 것과 그러한 삶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작가의 작업은 화려하거나 강대하여 관 객의 시선을 뺏거나, 퍼포먼스가 기발하고 독특하여 관심이 가는 그런 것과는 다 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작고 소담하며 평범하다. 앞에서 '어머니의 된장국'이라는 노래를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로 작가를 소개하기 위함이며, 또한 작가의 작품은 애초에 말린 야채나 고사리 같은 것의 이미지를 도상화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 그 노래가 떠오른 것일 수도 있다.
다시 10년 전의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 그 당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둑한 작업실 형광등 밑에서 화 판을 눕히고 배추 속 단면의 형태를 따고 있는 작가를 보며, 반찬으로 먹는 야채를 그려내는 작가의 동기와 또 그것을 묵묵히 선으로 그어가며 작가가 떠올릴 어떤 생각들에 대해 궁금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 작가의 작업은 그저 솔직했다. 우리가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표상들, 가족과 따뜻함, 그리움과 연민, 아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어떤 자세들에 대해서 먹먹하고 느리게 그려낼 뿐이었다. 수양일지 속풀이일지 알 수는 없지만 작가는 묵묵히 화면 가득, 야채의 줄기와 이파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꽤나 씩씩하 면서도 어떤 기억들을 품에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다른 모든 이가 그렇듯 작가 역시 자신의 삶을 묵묵히 쌓아가고 있다. 어울리는 배필을 만나고 작지만 소중한 터전을 만들고 그리고 간간이 몰아 치는 비바람을 겪으면서도 하루의 소중함을 실행해간다. 지극히 평범하고 또 지극 히 소시민적인 어떤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가는 한 땀 한 땀 기회 가 되는 데로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전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함께 준비하는 작가에게 화려한 무엇인가를 기대해 보고는 한다. 누가 보기에도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SNS 올리기 좋은 어떤 지점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예정했던 전시일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고 작가의 어떤 시도들을 같이 고민해 나가며, 그런 기대들이 다소 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심스럽게 보내온 그림 이미지에서 작가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결코 평범 한 것들은 아닐 것이다. 나름의 아픔과 사연, 상실과 미련, 그리고 다시 내일을 바라보게 만드는 작은 행복들을 생각해보면 그건 평범함이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 살아있는 작은 모험들일 수 있다. 그게 작가가 그리는 야채, 풀들, 꽃을 피우지 않은 것들도 함께 하는 삶의 과정 일터이고. 그리고 한 순환이 지날 때, 그 감정들은 그림 안에서 어떠한 느낌으로 잉태되는 것 아닐까.
이번에 공개한 작업들은 10년 전의 그것과 비슷할 수 있지만, 선은 더 부드럽고 화면은 꾹꾹 눌러 담았다. 기술적인 어떤 성장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더 맛이 자 연스러워졌다고 말하고 프다. 꼭 이혜진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다. 엄마의 밥상이 화려하고 유려하기보다 자연스럽고 푸근해 지듯, 그렇게 앞으로도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미나리서리단 <옥상 보수공사>(2023.05.20-06.03)
고은아, 김시연, 박혜민 3명으로 구성된 미나리서리단의 가 5월 20일부터 6월 3일까지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