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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익 개인전 <REDLIGHT>_20230325-20230408

황문익 개인전 <REDLIGHT>_

참여작가 및 기획 : 황문익 / 피그헤드랩 초청 기획 / 촬영 : 이규환

2023년 3월 25일부터 2023년 4월 15일까지 / 운영시간 : 12:00-20:00 / 유인 혹은 무인 운영

피그헤드랩 초청, 황문익 작가의 개인전 <REDLIGHT>가 2023년 3월 25일부터 2023년 4월 15일까지 피그헤드랩에서 진행됩니다. 전시의 시작일인 25일(토) 오후 6시에 간단한 인사가 진행됩니다.

작가를 위한 메모 

황문익의 개인전 <레드라이트>(이하 개인전)의 포스터와 제목은 교각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리나 도로 밑에 위치한 교각. 그것은 어떤 클리셰와 연결될 것이다. 거대한 탑, 큰 남근의 형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수컷으로서 취약함으로 인해 질투하거나 증오하는, 혹은 매료되는 현상으로 얘기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작가의 전시에 대한 글을 작성함에 있어 고민이 적지 않았다. 결국 세상의 풍파를 겪고 있는 작은 성기의 수컷의 이야기는 무거운 삶의 대한 고민과 자기연민의 이야기를 관객으로선 그저 건조하게 위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란 결국 인생에 대해 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예술가의 고달픈 삶과 고민들이 주가 되는 경우가 꽤나 많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관찰하거나 고민하는 입장에서는 작품 하나하나마다 예술가들의 고난과 무게감을 매번 의식하는 일은 피하고 싶을 때도 적지 않다.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였을 때이다. 그의 작업실은 동거인과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그 한 켠에 작업물들이 우겨 넣듯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익숙할 석고상들이 보인다. 비너스나 아그리파 같은 오리지널이 있는 대상을 면 분할하고 종이(혹은 플라스틱)로 다시 재조립한 것이다. 거기에 원래의 질감을 흉내내기 위해 다소 과장된 리터치가 들어갔는데, 연필 뎃생같은 느낌으로 아날로그한 명암을 넣은 작업이었다. 작가에게 물으니 조금 민망한 듯 웃어 보이며 과거부터 어디 내보이진 않고 쭉 쌓아 놓은 작업들이라 내게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지난 전시의 작업들은 당근마켓을 통해 거의 거저로 내놓았고 그게 또 팔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억하기론 그 때의 작업들은 불상의 형태를 재구성한 입체 작업이었다. 그때 생각하기를, 주제 자체는 조금 식상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이 참 좋아할 만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작가는 의외로 평면회화를 전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얽매이는 어떤 전통적인 과정들(아마 보수적인 한국식 도제 교육방식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전통적으로 설정된 재료사용 기법 등)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지금의 방식으로 도착하였다고 들었다. 형태의 단순화와 면 분할을 통해 재 구축된 작업들은, 작가 앞에서도 어떤 대상을 분해 및 재구축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이는 전통적인 양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과정을 거친 대표적인 인물들이 그렇듯이, 나는 자연스럽게 그가 초(超) 형태를 지향할 것이며 미래주의적인 조형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라 생각하였었다.

그리고 결론은, 이번 전시에 나온 작가의 작업들은 그런 내 기대와는 달랐다. 일단 이번 전시에 설치된 작업들은 앞서 설명한, 그의 사무실 한 켠에 쌓여 있었던 그의 과정작들이었다. 과정작이라 하기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그가 준비하고 공개하지 못했던 작업들이니 그렇다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의 큰 설치작업으로 엮여 있었다. 거대한 교각의 형태가 천장까지 치솟아 있고 그 밑으로 자신이 만들어온 작업들이 쌓여 있었다. 거대한 군집 같은 형태이다. 다시 그 앞, 1m정도 되는 지점에 상대적으로 작은 한 개체가 서있다. 이것은 작가의 아바타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 설치 당시에는 작가의 아바타는 교각과 자신의 작업물들을 ‘마주보는’ 형태였었는데, 전시 기간 중 아바타를 180도 돌려 ‘뒤돌아보는’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그 밑으로 깔리는 교각의 그림자. 작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작업물들을 교각의 일부, 거대하게 솟아오른 세상의 일부로 상정하고 그것을 마주보거나 뒤돌아보고 있다. 자신의 작업세계를 객관화하고 등진 것이다.

예술가들은 객관적이기 힘들다. 예술가에게 작업을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마치 “당신은 왜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과도 같은 것이어서 당혹스럽게 만들기 좋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은 대체로 본능적이 행위이기에, 결국 분리시킬 수 없는 어떤 들숨과 날숨 같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창작을 분리시키고 객관화 시키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욱이 그 창작의 기억들은 다시 작업으로 돌아와 거대한 교각, 거대한 성기의 밑에 존재하고 있다. 즉 자신의 대척점의 위치에 창작이란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창작이기보다 그가 배워온 아카데미즘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미술의 경우 상당수 아카데미의 교육을 통해 각자의 창작 본능을 전시라는 형태로 이루게 된다. 모든 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다. 황문익 작가나 나의 세대일 경우, 석고상을 눈앞에 두고 뎃생을 배웠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도제방식의 교육관으로 자리잡아 왔었고 요즘 시대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기술을 익히면, 인내심을 가지고 손을 훈련시키면 우리는 창작을 통해 어떠한 세계로 갈 것이라고 믿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기에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화하였다. 예술 뿐이겠는가. 유아교육, 입시풍조가 다 마찬가지 아닌가. 더욱이 예술의 경우에는 독특한 개성, 범상치 않은 성장기가 스타성을 만드는 만큼 획일화된 교육과는 애초에 거리가 있었던 일이다.

그의 아바타가 교각, 세상이란 거대한 탑 밑에 쌓여 있는 그동안의 작업들과 두었던 거리는, 그가 배워온 어떤 방식에 대한 거리감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아카데미만의 문제를 가르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가로서 살아오는 방식, 애초에 예술가라고 세상에 자신을 인지시키는 그 방법들이 하루가 지날수록 옛 것이 되어간다. 미디어가 찬란한 지금 시대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창작을 하는 방식이 이제는 너무나도 아날로그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가 그 작업들을 쌓아온 시간들이 결코 헛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이번 전시는 그가 믿고 신념해온 ‘나아가는 방식’에 대한 의문이며 어떤 복잡한 감정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리한 나의 생각들이 온전히 작가의 생각과 맞을 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렇다면 이건 꽤나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첫 개인전이라 한다. 그동안 전시는 꽤 해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개인전이라 알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전시에 자신이 한동안 열심히 쌓아 올린 것을 문득 어느 시점에 거리감을 두고 보는 행위는 어떤 의미로는 상당한 용기이다. 또 어떤 의미로는 이제 그 스스로 어떤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만약 그 변화를 시도한다면 많은 고민과 희생이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박수 쳐줄 수 있는 일이고, 혹여나 여기서 멈춰 뒤를 돌아보는 것도 큰 용기인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상당히 솔직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솔직하다는 것은 예술계에선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조적인 자기 평가를 보이는 솔직함이 마냥 좋다고 이야기하기는 아쉬운 지점도 있다. 전시는 그의 독백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러다 보니 기획자의 입장에서 다소 주춤하거나 조심스러워지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택한 자기 객관화의 방식은 결국 누구나 살면서 한번씩 마주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된다. 회화를 하다 입체를 하다, 종이를 다루다 플라스틱으로 다루다 정도의 미래가 아닌 인간 황문익의 시야가 더욱 확장되고 발전되어 나가는 계기의 가능성. 그런 시기를 맞이한 이상, 작가가 어떤 방향이든 방황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기획자로서의 마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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