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선 개인전 <그림 속 그 새는 울고 있던가>_20211127-20211211
홍화선 개인전 <그림 속 그 새는 울고 있던가>_
참여작가 : 홍화선, 기획 : 이선환, 공간협조 : 피그헤드랩. 촬영지원 : 이규환
2021년 11월 27일부터 2021년 12월 11일까지 / 운영시간 : 12:00-20:00 / 유인 혹은 무인 운영
홍화선 작가의 4번째 개인전 <그림 속 그 새는 울고 있던가>가 2021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피그헤드램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세레모니는 전시의 시작일(27일) 오후 4시에 진행되며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분들에 한해 초대합니다.
피그헤드랩은 코로나 19에 따른 정부의 경계지침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작가를 위한 메모
이 선 환
동양화를 전공한 나는 대학생 시절 먹과 붓으로 선 하나, 하나 의미를 담으며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하나의 색인 것 같은 ‘먹’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빛깔이 났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색을 띠는 먹이 신비로웠고, 먹 느낌을 독특하게 내는 사람들이 유독 부러웠다. 나는 먹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동양화 재료에 큰 의미를 담고 그림을 그려보려 노력했지만 난 유독 잘 안되었고, 이후 먹을 사용하지 않았다.
먹이란 재료는 참 그렇다. 기본적으로 먹은 미묘한 광택의 자연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전복을 먹다 보면 그 껍질 안에 묘한 무지개 빛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복 껍질 자체가 무지개 색이라기 보다 특유의 성분으로 인해 빛을 그렇게 반사하는 것이다. 먹도 마찬가지인 것이 시꺼먼 속에서 묘한 광택을 내뿜기도, 또 물을 조절하여 농묵과 담묵을 교차하며 단순한 검정이 아닌 다채로운 검정의 바리에이션을 포함한다. 여기서 그 바리에이션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다루는 지가 수묵의 관건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홍화선 작가와 전시를 기획해 보지 않겠냐는 피그헤드랩 대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가 배워온 동양화의 기본에 빗대어 홍화선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이 많았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나는 먹을 쓰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수묵이란 재료의 어떤 한계성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 예술의 관점에서 수묵을 표현하는 것은, 그 타당성부터 설명하는 것에 있어 한계를 느끼고는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현대 예술이 가진 존재의 진정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지금의 난제라 생각하였고 그런 지점에서 수묵화라는 그림은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특수성을 띄고 있다 생각하였다. 피그헤드랩의 대표는 그것을 마치 멸종위기종처럼 표현하고는 하였다.
그런 지점에서 홍화선 작가의 수묵과 새의 그림은 한편으로 내가 학생으로서 배워온 것, 또 기관 소속으로서 소장품으로 마주하는 전통, 그리고 현대 예술이라는 것들 사이에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였다. 문득 나는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의 <호취도>를 떠올렸고, 그 그림 속 매로 연결되었다. 흐느적 거리는 다리로 종종 걸어가고 있는 홍화선 작가의 새와는 상당히 극과 극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새는 어떠한 의도로, 어떠한 마음으로 그리는 것일까? 예부터 새는 다양한 의미로 그려져 왔다 생각한다. 독수리의 기개이기도 하고 지저귀는 새의 아름다움이기도 하였으며, 마당을 뛰어노는 닭들의 익살스러움이기도 하였다. 가령 호취도의 독수리는 장승업의 호방한 성격과 당찬 기새를 느끼게 해주는데 그것은 강렬한 필치를 활용하여 한 획 한 획 강렬한 색의 대비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동물이 털을 일으켜 세워 공격의사를 보이는 것처럼 독수리의 강렬함은 깃털 하나하나마다 강렬하게 보이게끔 의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홍화선 작가의 새들은 그 각자가 자기 자신의 연민으로서의 역할을 첫째로, 그 다음으로 그동안 살아오며 만나온 많은 이들의 바람을 둘째로 내포하고 있다. 새들은, 혹은 새 한 마리는 화려하고 다양한 먹과 붓질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조금은 요령이 멋쩍게 아는 척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담백하고 솔직하다. 화려한 기개가 아닌 “여기는 다리이고 여기는 날개입니다” 라며 소곤거리고 거칠거나 뾰족함 없이 “여기에 머리가 있지요”라고 덤덤히 내놓는다. 심지어 일부 작업들은 실크스크린의 방식을 써, 자칫 붓질에 내포될 수 있는 무수하고 방대한 이야기들을 함축적으로 묻어놓는다. 딱 여기에 그 새가 있네, 그 한마디만 하면 충분한 것이다. 화려함도, 대단함도, 거칠거나 뾰족한 기개도, 위태로운 위용도 여기선 소담해지는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작가는 그렇게 항상 웃으면서 인사해주었고, 마루에 앉아 풀어놓은 닭을 보며 담소를 나누듯 늘 부담 없이 그림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가령 인천 작업실에서의 방문에서도,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나 어마어마한 것을 풀어내기보다 자신의 만들어낸 작은 이야기들,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만들어낸 것들을 소박하게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작은 선물 하나 손에 쥐어 주는 그런 사람. 그것이 홍화선 작가가 살아온 인생,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어떤 연륜, 작은 지혜와도 같은 것일 테다. 그림 속의 그 새는 울고 있을까?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울지 않는 생명이 어딨겠는가. 그 울음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삶일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 슬프지 않은 사람 어딨겠는가. 그러면서도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일테다.
아, 마지막으로 홍화선 작가의 돌 작업을 소개하며 글을 마쳐본다. 홍화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인형과 같은 새로운 작업을 시도해왔는데, 그런 와중에 돌덩이 인형 하나가 나왔다. 얼핏보면 육중해 보일 수도 있는 그것은 먹을 칠하고 뿌려, 마치 현무암처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전시를 설치하며 작가와 나는 돌 인형을 들고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척 들어보면서 사진 찍으시라고. 그러면 참 재밌겠네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무겁고 육중한 이야기가 또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웃으면서 들어보는 작업 하나가 또 얼마나 소중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