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시각>_ Time Now
<지금 이시각>, 월간지 형식의 월간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획자 : 오종원, 발행 : 피그헤드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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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시각> 2023년 1월호, 참여필진 : 석민정, 오종원, 이안, 이은우, 이채연
신규 참가자 및 게스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오 종 원
문화예술인력 / 피그헤드랩 운영
어떠한 자리의 흐름에 대하여
1. 본문은 웹진 퐁의 로컬리티 워크샵에 참여하며 얻은, 일종의 영감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두 명의 인터뷰와 한 명의 조언을 바탕으로, 내 삶의 한 방식이었던 창작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알코올을 쏟아부은 경험담일 것이다.
2. 인사동에서 사람들과 저녁을 먹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즈음부터이다. 당시 대학교 재학생으로 교수님, 선배님 전시 오프닝에 쫓아다니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그때는 오프닝 자리 따라가서 박수에 동조하는, 그런 모종의 관례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인사동은 미대생의 입장에선 동경의 장소였는데, 동산방이나 관훈, 아트사이드 등 뚝심 있는 갤러리도 있았고 작은 신생갤러리도 계속 생기던 참이었다. 2000년대 후반 잠깐 있었다던 미술 호황기 때문인지 작은 갤러리들이 급증하는 느낌이었고, 또 지금처럼 갤러리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인사동이라는 골목길 하나에 집합해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바글바글한 로컬 아트페어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요일의 인사동 오후 5시는 큰 축제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교수님 전시, 무슨무슨 협회, 또 그때까지는 괜찮은 기획전들도 열리곤 하여서 수요일만 되면 오프닝 행사로 북적거렸다. 어느 갤러리를 들어가도 인파, 그리고 다과와 와인으로 가득한 케이터링 테이블을 볼 수 있었다. 오죽하면 수요일마다 전시장을 돌며 음식을 싸가는 정장 입은 거지들도 있었는데, 크게 제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충 4시 5시쯤 사람들이 전시보기를 마치고 케이터링 테이블 근처로 모여 와인 혹은 음료를 한 잔씩 하고 있으면 오프닝이 시작된다. 어차피 전시장을 천천히 돌면서 작품 하나하나 꼼꼼히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부인이고, 작가를 아는 사람들은 금방 쑥 둘러보고 바로 케이터링 자리로 온다. 그러면 이제 작가(미술관의 초대전 같은 규모면 관장이나 사회자가)가 인사말을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축사 같은 것을 하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시를 낭송하거나 클래식 연주를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한 삼십 분 내외 몇 번 박수치는 일이 끝나면 얼추 6시이고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쌈지 건물 인근과 인사동 외각에는 제법 큰 식당들이 있었다. 당시 오프닝 행사를 하면 학교 동문, 제자 등 이래저래 수십 명씩 모였고 그렇게 뒤풀이까지 함께 해주는 것이 미덕이었기에 결국 얼마나 크고 넓은 자리를 가졌냐에 따라 식당의 인기도가 갈리곤 했던 것 같다. 인사동 중심에는 사동면옥이라는 만두전골 집이 있었는데, 맛이 아주 기가 막히거나 양이 많다고 할 수 없음에도 매번 북적이곤 하였다. 자리가 넓다 보니 뒤풀이 두 자리, 얼추 백 명 이상은 거뜬히 수용한 것이다.
1·2차가 끝나고 나면 모이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밤 10시, 11시 늦게까지 문을 열면서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술집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OB파크라는 펍이 넓은 홀을 가지면서 늦게까지 하는 편이었고 거기에 모이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치고는 하였다. 다들 하나같이 남의 전시 오프닝 뒤풀이 온 상황이었다. 이때부터는 다들 마실 만큼 마셨겠다, 새로운 술자리가 형성되거나 하였고 종국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종각역 뒤편 포장마차에서 첫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예술이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지금으로 치면 꼰대 아저씨와 자기들끼리 건배를 하는 젊은이들이 섞인 광경. 그리고 식당 앞 골목길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 연기를 뿜는 작가들을 볼 수 있었다.
3. 2010년을 전후로 전시장들이 인사동을 뜨기 시작했다. 크게는 인사동 바로 위 삼청동, 그리고 통의동 일대가 그리하였는데, 그때는 두 지역 다 배드타운의 느낌이 강했었다. 아마 청와대 인근 북단이니, 지금도 그렇지만 큰 빌딩이 들어서 있거나 번화가와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먼저 삼청동의 경우 조용한 분위기로 조그만 갤러리와 카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적당히 예쁘고 특색있는 거리이긴 했지만 핫플레이스, 인스타 성지 같은 개념이 없을 때이니 아는 이들만 찾아가는 그런 동네 같은 느낌이었다. 삼청터널 인근까지 천천히 산책을 하다가 수제비집에서 마무리하는 패턴이 삼청동의 거의 전부였던 것 같다. 삼청동이 지금과 같이 화사해진 것은 비교적 몇 년 되지 않았다.
당시 통의동에 위치한 쿤스트독은 상당히 특색 있는 전시를 선보이곤 하였다. 단순한 표현으로 개념미술이네 무엇이네 하는 것들을 보려면 통의동으로 가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때였는데 이는 탈 인사동의 한 시발점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의 갤러리 팩토리, 보안여관 등이 좋은 전시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관건은 기존 대관 갤러리로 가득한 인사동에서 벗어나 신진 문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지역들에 갤러리, 대관 전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사동의 그것과 비교하면 피로감이 덜하였다.
그래서 통의동에서의 전시 뒤풀이와 인사동의 전시 뒤풀이는 개념이 조금 달랐다. 인사동의 경우 학교 동문, 스승과 제자 등 방문객 단위가 매우 큰 편이라면 통의동은 또래 작가들끼리 소소하게 모여 자리를 갖는 경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사동 오프닝에 있었던 어떤 격식 같은 것이 통의동에서는 덜했는데, 그래도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듯 오프닝 자리 같은 게 있기는 해서 케이터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는 손님을 모아놓고 인사하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청동이나 통의동이나 수십 명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큰 식당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식당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저렴한 메뉴에 술도 한잔하면서 시끌벅적하게 앉아 놀 수 있는 곳, 즉 작가들이 갈만한 곳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통의동에 경우 갤러리 골목 안에 조그만 식당, 메밀꽃 필적에나 청하식당 정도를 가고는 하였는데, 대체로 맛집이긴 하였지만 결국 동네식당 같은 느낌이라 손님 수십 명이 앉아 있기는 좀 그랬다. 내 경우 2013년 팔레 드 서울이라는 갤러리에서 첫 기획을 하면서 참여작가들,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매일같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결국 갤러리 근처에서 해결하지 못하여 서촌까지 내려오고는 하였다.
서촌 먹거리 골목(지금은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되었다)은 그 후로 미디어를 타면서 더 핫 해졌는데, 당시에만 해도 직장인 정도가 퇴근 후 한잔하러 오는 뭔가 아담한 느낌의 분위기라서 가격도 나쁘지 않았고 가기에 부담도 없었다. 다만 이 근방의 유일한 단점은 자정이 지나면 대부분의 술집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골목 끝 거의 유일하게 있던 후진 모텔이 대안이었는데 나중에는 우리 얼굴을 기억하고 입장 불가 통보를 받은 적이 있다.
4. 2010년 초반이 되면서 ‘신생공간과 그곳에 모이는 젊은 작가들’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어디선가 들었던 살롱문화라는 것이 이런 거 아닐까 싶긴 한데, 음악이 흐르는 술집에 예술가들이 모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그램’, ‘지원 사업’과도 같은 타이틀을 필두로 한 공간에 예술가들을 모아보려는 시도 같은 것들이 꽤 있었다.
당시엔 내 기준 성북구에 오뉴월, 문래동에 정다방, 통의동에 보안여관의 워크샵 프로그램이 크게 어필되었던 것 같다. 성북이야 뭐 역사적으로 예술인들의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고(6·25 이후부터라는 설도 들었다) 문래는 2010년대 쯔음부터 작업실을 얻는 작가들이 모여들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두 지역을 같이 묶기에는 조금 그런 감이 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문래는 해가 지면 상당히 어두웠고 조금 무서웠다. 거주지역과 공업단지가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었는데 해가 지고 나면 한 쪽은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작가들은 그런 오래된 공장건물의 2층 내지, 3층 조그만 쪽방 하나를 얻고는 하여서, 누구 작업실을 밤늦게 놀러 갔을 때 꽤 어두운 골목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문래역 가는 길 쪽으로 조그만 술집이나 카페 같은 것들이 생겼지 당시에는 그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날 좋은 문래동의 주말은 이곳저곳 옥상 등에서 소소한 행사들이 열리곤 했다. 퍼포먼스를 포함해서 꽤 마이너한 작업들을 볼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 문래동에 모이는 작가들은 완전히 신진작가보다 어느 정도 경력 있는 작가들이 많아 자체적으로 무엇인가 추진해보기도 했던 것 같다. 아마 문래 예술공장이 위치한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게릴라적이고 무엇인가 거친 작업들을 보면서 언더그라운드라는 단어가 문래동에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워크샵 프로그램 얘기로 돌아와, 오뉴월이나 정다방이나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꽤 많은 이들이 참여했으면서 어중이 떠중이는 없던 것 같다. 대체로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작가에 따라서 두 개의 워크샵에 다 참여하게 되어 한주는 정다방을 갔다가 또 한주는 오뉴월을 갔다가 하는 이들도 있었다. 생각하면 대표들은 기분 좀 상할 일 아닐까 싶은데, 그만큼 작가들의 왕래가 많았고 서로서로 소개도 받으면서 술친구를 찾아가던 때였다.
이 워크샵들은 대부분 예산을 지원받아 진행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매주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인근 술집에서 술을, 그것도 꽤 늦게까지 마시고는 하였다. 나는 오뉴월 워크샵에 참여했었고 매번 끝나면 가는 간이역, 그리고 새천년 치킨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둘 다 조그만 식당이었는데, 테이블 두 개 세 개를 이어 붙여 열 명 이상이 다닥다닥 앉아 서로의 기량을 뽐내며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이 중에는 늘 독특한 작가가 한두 명씩 껴 있어 간간이 자리를 망치고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고, 또 어떤 의미로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때였다.
한참 뜨거웠고 활기가 넘쳤으며, 거기서 눈이 맞아 전시를 만들고 인연도 만드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나는 지금 돌이켜봐도 그 시기가 신진작가들에게 제일 재밌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삼 년 정도 지나면서 그런 마땅한 자리도 없었을뿐더러 전체적으로 침체기 같은 느낌이었다.
5. 앞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실 홍대를 빼놓을 수가 없다. 홍대야말로 어떤 의미로는 전통적인 강자라 갤러리 잔다리, 대안공간 루프, 쌈지갤러리 등 인사동 세대에게 대척점이 되는 훌륭한 곳들이 참 많았다. 서교예술실험센터도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하였고. 근래까지 그랬지만 홍대 하면 진보적이고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젊은이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특히 대안공간 루프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데, 실제로 홍대를 방문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유는 루프의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론 다른 이유로 방문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예술인들은 겸사겸사였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사람 넘쳐나는 9번 출구를 피해, 8번 출구로 나와서 루프를 들렸다가 서교예술실험센터를 들리고 거기서 아는 이를 만나 술 한잔 하는 위주로 코스를 잡고는 하였다. 당시에는 이 두 곳 때문에라도 홍대는 올 만한 가치가 있었는데 국내외 젊고 참신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한참 때의 루프는 아시아 미디어 작품 페스티벌을 주기적으로 하였는데 그게 나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홍대 앞 먹거리 골목은 2010년 극 초반만 하여도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한류열풍 중심지 홍대와는 거리가 살짝 있었고, 관광지이기보다 젊은이들이 많이 오는 거리에 가까웠다.(그 둘은 정말 다르다) 홍대 정문 옆 클럽 거리와 놀이터 근처는 대체로 젊은이들이 바글바글 했었다. 내 경우에는 클럽을 즐기지 못하는 찐따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호미화방 근처 곱창집, 전집, 라멘집 정도를 방문하고는 했다. 혹자는 홍익보쌈집 위층이 다락방이어서 정취가 좋았단다. 인근 두리반이라는 국수집이 젠트리피케이션의 표상이 되어, 예술가들이 많이 응원했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이야 프랜차이즈가 넘쳐 나지만 당시만 해도 참신하고 특색있는 술집들이 넘쳤었다. 선배 따라간 홍대 곱창전골에서 느낀 문화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당시의 곱창전골은 밴드명이었다가 가게 명이 된 것으로 아는데, 그때의 독특한 포스는 지금도 따라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홍대 하면 또 합정과 상수를 빼놓을 수 없겠고 카페 골목을 언급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듣자 하니 2010년 초중반을 기점으로, 이리카페가 산울림소극장 쪽에 있다가 떠밀려서 상수 쪽으로 옮긴 게 카페거리의 계기라고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홍대생들은 이리카페에서 관련된 서적을 읽으며 자리를 하던 추억들이 무척 많아, 그곳으로 따라갔다고 한다. 합정의 경우 메세나 폴리스가 들어서며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시각예술 사람들은 합정지구 아니었으면 그리 갈 일이 있었까 싶다.
부끄럽지만 나는 홍대 하면 쪽팔린 흑역사들이 많이 생각난다. 당시까지만 해도 홍대는 뭔가 청춘을 설레게 만드는 아우라 같은 것이 있어서, 술 먹고 실수한 기억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런데 또 당시의 홍대라는, 어떤 분위기 안에는 들어가지 못해서 홍대라는 단어에 가진 묘한 거부감도 없지는 않았다.
6. 청담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작가들끼리 술 마실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아마 대도시의 수직 수평적 화려한 광경은 예술가들에게 다소 부담스럽겠지. 그래도 송은아트큐브가 어느 정도 유망한 청년작가들을 백업하는 지점이 있어서, 간간이 아는 분이 오프닝을 하면 해당 사옥에서 케이터링을 하는 것이 꽤 좋았다. 싸구려 메뉴에 소주를 까며 나누는 시끌벅적함이 아닌, 샐러드바와 함께 와인을 마시며 우아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어떤 의미로는 낯선 풍경이었다. 특히 당시 큐레이터분의 절도있는 이미지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도 송은에서 전시 한번 해보는 게 꿈인데 다 그 자리 때문이다.
사실 본 문에서 한남동, 만리동, 을지로 등을 언급하고 싶은데 첫째는 지면의 상황, 그리고 저 세 지역은 다른 관점에서 언급할 것이 있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뤄본다.
7. 코로나19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계에 미친 영향이라 하면 사교적인 자리의 단절, 관련된 많은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 3년은, 많은 예술인들이 많이 슬퍼하였을 것이다. 나는 코로나의 등장이 어떤 기점, 속칭 MZ세대라고 불리우는 어떤 세대의 분리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나이나 태어난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역과 사람 간의 거리가 강조되고 그만큼 유대와 연대라는 단어가 상대적으로 빈약해진(그러나 부족하다고 할 수 없는) 시기의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예술계에서 어떤 오프닝 자리 같은 것이 줄어든 게 꼭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기도 조금 그런데, 내 관점에서는 2010년 중후반에 들어서며 그렇게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는 오프닝 자리가 이미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결론부터 딱 이야기하자면 그 이후 몰아닥치는 경기 침체, 젠트리피케이션이 큰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사동의 경우 실제로 코로나 시기와 엇물리기도 하지만 대관 갤러리가 많이 줄어들었음을 느끼게 된다. 대관 전시의 경우 대체로 더 많은 이들을 한 공간에 수용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일이다. 대학교의 졸전, 무슨무슨 협회의 전시가 바로 그러할 것이고 그러한 만큼 외부 손님의 수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만큼 오프닝 자리도 당연히 북적이는 것이겠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인사동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동시에 시각예술계에 몰아닥친 변화의 바람 및 전반적인 경기불황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공간들이 성북이나 문래, 이후 영등포 등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더이상 니어 바이 종로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기존에 있었던 큼직한 갤러리의 경우 여전히 기존의 위치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굳이 사업 단위가 크지 않은 공간(대관 등을 거의 하거나 자체 소규모 기획전을 하여 수익구조가 약한 공간 등)은 특정 지역에서 버티고 있거나 큰 공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서 대체로 작은 공간으로, 파편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 과거에 종로에 간다는 것은 ‘이 전시도 들러보고, 겸사겸사 저 전시도 들러보고, 마지막에 저녁이나 먹고 오자’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 지역들에 분포되고 작아진 공간들을 방문하는 것에 크고 작은 기회비용의 부담이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각예술계의 인구 감소를 언급 안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구 감소라는 표현은 관찰하는 이의 상황과 관점마다 다 다를 것이지만, 미대에 유입되는 인구부터가 줄어들고 있는 판에 졸업을 해서도 작가를 지향하는 이는 줄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 정보화의 확대 탓일지, 먹고 사는 일이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인지 이제는 다들 예술가라는 것 자체가 생계를 이을만한 직업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런 복합적인 원인이 바탕인지 실제로 2010년대 중후반 이후 작가 공모전이 상당히 많이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자체적으로 커뮤니티를 운용하기는커녕 관련된 무브먼트를 벌이는 공간들은 보기 어렵다. 각자도생의 시대인 것이다.
8. 나는 여전히 술자리를 사랑한다. 그리고 아는 이의 전시 소식을 들으면 언제 술을 마시냐에 맞춰 일정을 잡고는 하는데, 요즘은 그러한 것이 썩 어색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전시를 개최하면서 별도의 오프닝을 하는 것이 주최하는 이나 참여하는 이나 서로 부담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 술자리라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더욱이 술 권하는 분위기는 현진건 이후로는 사양길이라지만 이제는 그게 실례의 범주에 들어가니 이야기하기도 여간 어렵다.
얼마 전 일하는 회사 근처, 인사동 무슨 갤러리에서 대학 후배들의 졸업전시가 열린다고 들었다. 인사동은 이제 몇 개의 전시도 동시에 거뜬할 만큼 대규모 대관 갤러리가 자리 잡았고, 후배들의 전시도 그 중 하나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근처이니 한번 들려보았는데, 한 점 한 점 보다 보면 참 열심히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고민했을 것이며 또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을 것인가. 몇몇 인상적인 작업을 발견해서 말을 걸어보니 작업을 계속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더라. 그래 이제는 그럴 때라는 생각이, 또 그게 어떤 기준점에서는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동에서 전시를 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이며, 인사동에 대관 요청을 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선배님 식사하고 가세요! 라는 말에 긴 오프닝 행사를 끝까지 기다렸다. 진행되는 행사는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사회자가 인사를 하고 나서 교수님들을 한분 한분 소개하며 인사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변하지 않는 전통이었다. 다만 코로나 이후의 영향인가 케이터링이 변하였는데, 예전에는 와인과 함께 치즈 같은 것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요즘은 포장된 쿠키박스를 답례품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다. 하긴 준비하는 입장에서 이게 훨씬 나을 것이다.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나니 뒷풀이 장소로 모신다고 한다. 누군가를 따라서 여전히 남아 있는 인사동 외각의 제법 규모있는 식당. 들어가고 나니, 나를 포함해 졸업한 선배, 조교, 교수님들만 모은 자리였다. 학생들은 따로 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인사동의 술자리는 다시 돌아왔지만, 무엇인가가 바뀌었구나. 여전히 변해가는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이다.

석 민 정
삼십대 / 문화예술인 / 교습소운영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_6
ep. 18 로또를 사는 아이
일주일 내내 눈에 띄는 번호를 핸드폰 메모장에 적는다.
그애가 맹신하는 번호는 4,5, 9, 17 정도.
나와 그애에게 기념에 되는 번호를 조합한다.
예를들어 4+9는 13, 5+17은 22 이렇게.
토요일 점심엔 로또를 사러 간다.
나는 안산다고 하다가 귀찮아 자동으로 하나 산다.
그 애는 그 좁은 로또방에 앉아 집중한다.
로또방을 나와 연약한 로또종이를 각자의 지갑에 고이 넣고 우리는 여느때와 같이 또 걷는다.
지하철을 타고, 걷고 또 걷고.
다리 아프면 잠깐 앉았다가 또 걸으며
“민정아 이게 우리의 희망이다! 민정인 당첨되면 내일 뭐할거야?”
“일하러가야지”
“1등 당첨되도?”
“당첨금은 저금하거나 제테크하고, 일은 해야지”
“하고싶은건 없어?”
“그럼 중고차나 하나 사고 나머지는 저금해야겟다 ㅋㅋㅋㅋ 오빤?”
“난 내일부터 당장 출근 안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참을 행복회로를 돌리며 깔깔대다가
어느덧 9시가 다 돼고
우리는 시끄러운 곳에 있더라도 가장 경건한 곳을 찾아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을 한다.
물론 꽝 인걸 알았지만
사실은 어제 꿈이 좋았었어 하며 진심으로 기대해서
매번 가슴이 아프다.
5000원으로 빵이나 사먹을 걸.
그 다음주 나는 또 왜사냐 타박하며 마지못해 자동 한 장 사고
그 애는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하며 숫자를 골라낸다.
ep. 19 길몽일까 흉몽일까
무더운 여름이었다.
일이 끝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벽화마을을 올라간다.
재택을 하던 그 애는 마중을 나왔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내 주위를 어색하게 맴돈다.
무더운 날씨에, 끝없는 계단까지 오르느라 한층 심기가 불편해진 나였다.
“민정아 한번만 안아보자”
(그만 좀 해라 원빈도 아니고)
그러더니 그 더운 날씨에 갑분백허그…
왜그러냐 물었더니 꿈을 꿨단다.
내가 창문에서 떨어지는데 그 애는 나를 구하려다 못구하고
나는 슬픈 표정으로 떨어져 죽었단다.
그리고는 잠에서 깼는데
마음이 많이 먹먹하고, 꿈 속 내 표정이 너무 처연해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다고.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는
귀엽고 애틋한 이야기.
“그럼 이제 나의 소중함을 좀 알지 그래?”
퉁명스럽게 말한 이유는 그 당시 우리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나도 꿈을 꿨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떠한 이유였는지 그 애가 죽었고.
나는 담담하게 장례까지 잘 치뤘다.
그리고 아마 꿈 속에서 몇 일이 지난 것 같았다.
밤에 집에 걸어가는데 문득
이제 이 세상에는 그 애가 살고 있지 않구나. 실감이 들었다.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 하지만 그 애는 이화동에 살고있고 내가 전화하면 무조건 목소리를 들려줘.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세상 어느곳에도 그 애는 없고 이제 더 이상 그 애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강력하게 때렸다.
꿈속에서도 거대한 파도가 나를 잠식시키는 것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감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나는 꿈속에서 까만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이 아플정도로 울다가 깼다.
꿈에서 깨자.
옆에 그 애가 있는 걸 확인하고
꽉 안아보았다.
잠귀 밝은 그 애는 금방 깨, 무슨일이냐고 물어왔다.
너랑 같은꿈을 꿨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 둘만 남은 외로운 사람들처럼 서로 꼭 안아주었다.
길몽일까 흉몽일까.
한 동안 길몽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우리는 그 꿈을 꾸고 한 달 뒤 헤어졌었지.

이 채 연
창작가 /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주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2022년 4월 25일 ~ 5월 5일)_2
지난 12월호에 이은 두번째로, 지난 4월 말에서 5월초 다녀온 스페인 여행에 대한 글과 그림이다. 이번호부터 보신 분이나, 지난 글을 봤지만 기억 안 나는 분들을 위해 지난 글 앞부분을 요약한다.
「친구인 S작가의 전시회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있어서 떠나게 되었다. 친구의 전시진행스텝도 하고 관광도 할 겸해서. 여행의 여정을 재미나게 쓸 자신이 없어서, 메모 같은 기록과 미술인이라는 본업에 충실히 하여 여행 중 기억에 남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남긴다. 여행의 풍경들이 잊혀 지지 않게,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올해가 가기 전 꼭! 」
거리에서_학교 앞 분수
길을 걷다가 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쯤 될 것 같아 보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니,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생각이 났다. 아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편식이 심한데 밥은 잘 먹었을까? 잘 씻고 다니는지…? 학교 준비물은 잘 챙겨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핸드폰을 켜보니 아들 반학부모 단톡방에 운동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때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 더워진 날씨에 반친구들은 다 반팔을 입었는데 아들 혼자 긴팔을 입고 있었다. 덥고 힘들어 보였다.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거 해라. 저거 챙겨라~’ 라고 이런저런 톡을 보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멀고 먼 이 곳까지 와서 뭔 이런 생각을. 이건 참견이야. 알아서 잘하겠지.
여기 거리에 환하게 웃으며 노는 아이도 있고, 간식을 먹고 있는 아이도 있고, 무엇 때문인지 표정이 별로인 아이도 있다. 또 다시 아들이 궁금해진다. 울 아들은 환하게 웃으며 하교하고 있겠지? 문구점에서 간식도 사 먹고… 핸드폰에 저장된 아들사진을 잠깐 보는 것으로 그리운 마음을 달래고, 다시 걷는다. 이제 아들생각은 그만하고 풍경을 보자
거리에서_과일가게
여행자로서 여행지의 거리를 다니는 것은 시한부다. 정해진 시간 안에 탐색하듯 시간과 공간을 홀가분한 기분의 걸음으로 즐긴다. 신경 써야 할 집안일이나 가족없이 내 주변만 살피며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이 그냥 마냥 좋았다!
나라와 지역에 따라 보여지는 색은 다르다. 내가 사는 곳과 마드리드에서 보여지는 색도 역시 달랐다. 매일 보던 것과 달라서 흥미롭다. 사진도 찍고 자세히 보게 된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년~1614년)
이번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 중 하는 좋아하는 화가 엘 그레코의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이다. 엘 그레코의 원화를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 기회! 엘 그레코의 작품은 톨레도에 많이 있다. 톨레도는 한국의 경주 같은 곳이라 들었다. 톨레도의 하늘과 엘 그레코의 그림과 같이 기억된다. 하늘은 맑고 투명한 파랑의 느낌이었고 엘 그레코의 그림은 투명하고 깊은 먹색이 느낌이었다. 맑고 깊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비슷했지만, 대조적인 느낌이 들었다.
엘 그레코의 인물화에서 특징인 눈 표현. 간구의 기도와 열망으로 가득 찬 눈이 인상적이었다. 요즘 말로 ‘맑은 눈의 광인’정도 될까나? 위에서 아래로 30도정도 기울여진 사선 방향의 붓질이 안 그래도 길게 그려진 인물을 더 길게 보이게 하고, 하늘로 향하는 기도의 몸짓 같아 보이게 만들었다. 새삼 느끼게 되는 종교과 예술. 작품이 전시된 곳도 대부분 성당이다. 그림을 보고 성당도 둘러보고 나서는 길에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게 된다.

미술관_고전 작품의 영향
미술관에서 ‘여인’들의 그려진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살결’ 표현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만지고 싶은 촉각과 흐름. 그 느낌을 이어 가기 위해 귀국 후 바로 그렸다

이 은 우
그림 그리는 사람 / 본업과 부업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 중
12-1월_관찰일지
2023.12.11
산을 오르는 것은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좋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한발 한발씩 올라가는 것이 참 즐겁다. 오를수록 벅차오르는 숨, 추웠다가 더워지는 몸의 온도, 앞지르고 뒤따라가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산 속의 고양이, 처음 보는 회색빛의 새, 높은 곳에서 밀려오는 공포심 등. 몸의 모든 감각과 생각이 조금씩 펼쳐지는 느낌이 든다.
하산은 목표를 이미 달성한 상태에서 원점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하다.
그래도 그 후 느껴오는 몸의 근육통은 꽤나 뿌듯하게 느껴진다.

2023.01.02
캄보디아 친구인가?
롯데리아에서 낮 한시. 어떤 할아버지와 어린 친구가 한께 햄버거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우리나라 아이는 아니었다. 굉장히 재잘재잘 말을 잘 하고 있고 할아버지는 경청하고 있다.
빨간색 타탄체크 모자를 쓴 키 큰 할아버지, 속눈썹이 긴 조금 작은 친구. 그리고 빨간색 캐리어.
2023.01.03
한 공간에서 일어난 엄청난 말싸움.
듣는 사람도 그 기류에 휩쓸린다. 제지하는 사람이 있지만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이 사람들의 모든 관계들이 보인다. 종이장보다도 더 얇디 얇고 날 서있는 관계.
2023.01.04
인간은 무엇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걸까? 아이, 개구쟁이, 건강한 청년, 동물은 이런 무미건조한 일상의 순간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아침에 즐겁게 일어나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그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당연함을 잃은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 필사적으로 진정한 삶의 순간을 찾는다. 반짝 빛나는 짧은 섬광에 행복해하는 순간
- 헤르만 헤세 <외로운 밤> 중에서

2023.01.09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모든 행동들과 말들이 때로는 버겁다. 몸조리 잘 하라는 누군가의 말도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이 꽤 많이 문드러진 것 같다.
2023.01.11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났다. 보험, 과실, 합의 등등 나에게 썩 낯선 단어들 투성이인 일이었다(물론 엄청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을 겪고 보니 내가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단 생각이 조금 들었다.
가만보면 그렇다.
어릴 적엔 부모님께 용돈을 계속 타서 썼고, 독립을 시도해 보았으나 적당한 이유가 없어 하지 않았고, 관리비가 어떤 식으로 책정되는지 몰랐고, 집 수리며 쓰레기 배출이며 집안일에 대해 그다지 신경쓸 일이 없었고, 보험료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이건 여전히 헷갈린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며 어떠한 취미를 즐기는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께 용돈 혹은 좋은 선물 하나 드리지 못했고, 등등..
이렇듯 사회가 돌아가는 기본적인 어떤 구조들에 늘 나는 벗어나 있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걸리적거리진 않았지만 가끔은 마냥 편히 사는 사람같았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이런건 잘 모르겠고 여전히 나는.. 마냥 어린애 같다.

이 안
원형아티스트 / 누가 뭐래도 세계에서 젤 잘나가는 만신
마지막 시도였어요.
마지막 시도였어요. 무당의 삶아 아닌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절의 사무실, 종무소에서 일을 하며 내 삶이 달라질 수 있다면 그깟 절이면 어떨까 싶은거에요. 19살겨울 20살이 되기 몇일 을 앞두고 처음으로 절을 찾아 갔어요.
고삼때 돌아 가셔서 그때는 어떠한 애도도 할 수 없어 그제야 외할머니를 위해 49일 기도를 올렸어요. 그리고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인데 왜 그걸 몰랐을까요.불교의 경전에서 말하길 기도를 하면 많은 것들을 이루어 준다는 말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어요. 무당이 안될 수 있다니! ( 이미그 이전에도 그때에도 만신이었지만 인정할 수 없는 나의 바락이었어요) .
그래서 달려 들었어요 엄마. 저는 절에서 살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렇게 살다보면 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절에서 사는 모든 것이 수행이라는 주지 스님의 말씀에 한번에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거라고 믿고서요. 지금 생각하면 미혹의 극치 이지만 그때 만큼은 그만큼 절실했어요.
기도를 하면 금은 보화를 혹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말이 결국 어차피 험난한 세상,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너가 금은 보화를 갖는건 갖지 못해도 가졌다고 마음을 가졌다고 먹으면 가진 거라는 뜻이라는걸 왜 그땐 몰랐을 까요. 바보. 훗. 일체 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그 희망고문.
새벽 세시에 일어나 다기에 맑은 물을 올리고 각전 마다 돌아다니며 다 올리고 나면 이제 아귀가 먹으라며 주전자에 아귀가 먹으려 모여든 다던 그곳에 물을 쏟아내며 말했어요. 잘 먹어. 그리고 새벽 예불을 보고 다시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종무소에 들어가 컴퓨터로 자료를 옮기는 작업을 하고 사시예불에 사람이 북적이면 금방 점심시간이 다가와 점심을 먹고, 오후는 한가할 것 같지만 각각의 스님들의 수발에 하루가 잘도 갔어요 엄마.
어느 날이었어요. 불사를 한다며 단청을 새로 고치려고 오랫동안 불사를 진행하던 주지 스님은 큰마음을 먹고 돈이 다 모이지도 않았는데 지붕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루어 지리라. 라고 서원을 세우며 시작하셨고 그 부처님의 원력은 신도회장님의 아들이 사법고시에 붙길 간절히 원하는 보시였고요. 흣.
어째뜬 그들은 단청이 훌륭하게 되기 위해 수요일 마다 단청을 올리는 그곳애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수요일은 아직도 십 몇년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엄마 아미타부처를 모신 미타전에서 아미타경을 합창하던 보살님과 처사님들 목소리가 쩌렁합니다. 양쪽으로 문을 다 열은 여름날이었구요.
그 위로 누군가 지붕위에 쭈구려 앉아 먼 곳을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분도 불경을 듣고 있나 봅니다. 먼곳에 고정된 시선은 그대로 두고 주머니를 뒤지고서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 마쉬고 연기를 뿜어 냅니다.
엄마, 마치 엄마의 담배연기처럼 저기 멀리로 퍼저 나가더군요. 그리고 연기에 삶의 모든 무게가 다 담겨 있더군요. 금새 사라질듯 사라지지 않고 한여름, 아지랑일리없는 그 담배 연기는 마치 타락 천사의 마지막 장면 처럼 저기 공기중으로 흩어 졌습니다. 하지만 오래 머물면서요.
또 한움쿰 연기를 뱉어 냅니다. 아미타 경을 읽으면 무엇이 좋아 지고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다는 그 부분에 연기는 또 깊숙이 페부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 깊고도 넓은 덩어리 연기를 뱉어 냅니다.
중년의 그녀에게, 연기를 그리 깊게 뱉어내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맞죠? 나 여기에 이율배반적인 이 상황에 온갖 원력을 이루겠다며 스님이고 신도고 열심히 경전을 읽어 되는데 당신은 담배 연기라니요. 근데 왜 그 연기는 가볍지 못하던가요. 연기는 가섭 존자의 염화 미소이더군요. 당신은 알고 있는거죠”.
한참을 중년을 그녀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해서 종무소로 들어옵니다. 괜히 눈시울이 많이 뜨거웠습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는데, 나는 또 이곳으로 도망왔구나. 시장통에서 부처가 난다는 이 말법 시대에 나는 왜 시장통이 아닌 절감을 택했는지 그제서야 나는 많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그놈의 무당되는게 뭐라고.
반년넘는 절에서의 생활에 미련없이 주지 스님에게 상처를 주며 나왔고 저는 자퇴한 학교를 다시 준비했어요 엄마.
엄마, 차치하고, 전 다시 엄마의 담배 연기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감옥에 갇혀 있는 나를 보게 해 주셨어요.
-엄마가 담배피는 모습 참 멋지다. ..
하시며 연달아 세대를 피우시며 내뿜는 연기에 당신의 삶의 무게, 당신의 삶의 자세, 그리고 너 자신을 갈망하라는 당신의 진심어린 충고가 담겨 있었더군요 엄마.
그놈의 일체 유심조. 모든게 이루아 진다면 그건 삶이 아닌데 바보 같이 이상은 이루어 지지 않는데 그걸 바랐다니요.
그리고 아줌마, 엄마라고 부르라고 해놓고서 그 어린 고사리 손으로 무당이 된 애기한테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 주마 하고 가지고 놀다 버린 아줌마, 엄마라는 말 시컷 들으니 좋으신가요. 막 무단 생활을 시작한 어느 새해에 예약도 차고 들아와 엄마라고 부르라며 가스라이팅 하던 당신은 아직도 그러고 살고 맀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제가 이제 마음을 내려놓겠습니다.
안미워할게요 아줌마 아니 할머니 그리고 새해복 많이 받아. 알았지? 우리 엄마 아들 사이였는데 그리고 분리수거 당했는데 뭐 반말 쯤이야.
일체 유심조 마음 먹기 달려 있으니 아줌마도 쫌 사이킥정키 노릇좀 그만하고. 새해복!
여러분! 2월, 3월, 4월호에는 무속에서 궁굼한 삼재와 궁합 그리고 귀신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부적 프로젝트_4
편집자 : 2022년 9월호부터 이안 필진의 신규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매달 사연을 받고 그 사연에 대해, 이안 필진이 만신으로서 답변과 이에 따른 부적을 제작해 드립니다. 종교 혹인 신앙의 측면에서 부적이란 것에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나, 본 작업은 이안 필진의 전통 계승 및 독자적인 해석 차원으로 창작의 측면이 강하며 또한 받아들이는 분들께서도 이것을 부적은 물론 자신의 소망을 위한 심볼, 도상, 기하학적인 무늬, 작품 등 상징으로 해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매달 1~3명 내외, 익명으로 된 사연을 피그헤드랩에서 취합 후 이안 필진에게 보내는 방식이며 본 과정을 통해 제작된 부적들은 먼저 이미지로 사연자에게 전달되고 이후 취합하여 전시로 제작할 계획입니다. 전시 종료 후 부적들은 사연자들에게 배포될 예정입니다. 이는 진행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본문에 게시된 사연은 일부 각색된 내용입니다.
1월달 사연_1
H씨
9X년 1월 X일 / X시 X분
종종 자신의 지병으로 인한 통증으로 죽는날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물론 기우일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도 몇번 죽을 고비를 넘어오기도 했고 그런만큼 매순간 마지막이라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디 언젠가 이 삶이 끝나는 날이 올때 그 어떠한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남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이 임하는 작업과 추구하고자 하는 뜻을 위해 전심 전력을 다해 삶을 끝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신으로의 답변
’자신‘의 지병으로 통증으로 죽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도 넘기셨구요. 제가 지켜 봤던수 많은 분들은 죽음이 가까워 오면 그 삶을 받아 들이고 포기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이셨습니다. 포기라기 보다 ’ 받아들임‘ 이겠지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무엇. ’백방‘의 손씀이 무익하여 죽음의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깊은 두려움에 그저 작은 웃음 보여주시기만 하셨던 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죽음보다 무력함이 더 두렵다고 하시던 분도 생각 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많이 다르시네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 가겠다는 의지가 참 보기 좋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삶의 끝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해 ‘자신’은 ‘최선’을 다할 거라고저 짧은 사연 속에 수차례 언급하시는 모습에 결연함도 느껴집니다.
선생님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 가고 있다고 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시 죽음 앞에서는 ‘후회’ ‘미련’, ‘아쉬움’ 은 없어야 한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행하는 작업과 작가정신을 위해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끝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는 글을 수없이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 점점 짙어지는 질문이 하나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대부분 사람들은 나에 대한 글을 쓸때 자신을 “자신”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나 혹은 내가 붙은 내 자신 혹은 저 라고 표현하죠.
누군가가 대신 써준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이 사연을 쓰셨다면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러 타자화하는 모습이 적확하게 발견됩니다. 소위말해 내가 말을 하지만 내가 들어가 있지 않는 문체. 네 많이 들어 보셨죠 유체이탈이라고 하죠. 비난하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무엇을 위해 지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지병의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겠다는 우리 선생님이 또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죽음마저 걸고 작업과 작가정신을 다해 온힘을 다 한다고 말씀 하시는지요.
드라마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진심으러 싸 주심에 분명함에도요. 왜냐면 나를 타자화 하고 나를 마치 나 아닌듯 남처럼 이야기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의 질병이 드라마 속의 나 혹은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멋들어진 나를만들어 나가는데 방해를 해서 그런 이유 일 수도 있는 것 일까요? 아니면 ‘지병’이 아니라 ‘지병의 통증’ 으로 죽어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으신가요?
선생님 하나 담담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통증이 찾아와도 살을 찢어 내고 내가 나를 도려 내거 싶을 만큼의 통증이 찾아와도 선생님은 지금 가지고 있는 질병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점받치 주제에 혹은 만신 주제에 그런걸 너가 감히 장담을 하냐고 한다면 글쎄요 선생님께서 이미 답을 다 내려주셨고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지병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죽음의 고비를 무사히 지금껏 씩씩히 넘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이러한 삶이 맘에 들든 안들든 선생님께서는 지병이 아닌 지병의 통증을 원동력 삶아 죽음도 불사하고 작품에 매진하시겠다는 다짐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 부적에 수많은 가로의 선과 세로의 선이 보이시는 지요.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해와 달 아래서 그러니까 무속에서는일월성신이라고 하고, 과학에서는 우주라고 표현하겠지요. 그 아래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나를 정의 하고 내 주변을 정의하고 내 삶의 방향성을 정해 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를 포함한 모두, 심지어 부처였던 그양반도 내가 신으로모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한때는 그 방향성과 자신의 삶의 방식에 경도되어 자신을 있는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저렇게마음에 금을 긋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일월의 큰 하늘 아래 두지 않고 작은 사각형 아래 두고서 그것이 전부 인양 끙끙매달고 살다 또 삶에서 전환기를 맡겠지요.
고통으로 인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고자 한다면 제가 내준 숙제 한번 해주시겠어요?
저 선들이 만들어낸 내모난 섬들안에 각국나라와 각시대의 “나” 라은 단어를 해방으로 이끌어 주세요. 좀더 구체적으로말씀 드리자면 그 장렬한 삶을 우선 타자화 하면서 까지 나 아닌 남으로자신을 받아 들이기 전에 저 선들이 을 지워서 저안의 수많은 나를 자유롭게 해 주세요 방법은 저 부적을 보고 난 후 눈을 감고 하나 하나씩 가로줄 새로줄 지워 내 봅시다.
그럼 지병의 고통을 뛰어넘어 지병과 마주할 수 있는 선생님을 뵙고싶습니다 오늘따라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14년을 살다 간 어느 할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오래살 선생님. 힘내세요 자신을 사랑해주신다면 아마 지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절대 엄습하지 않을 것이고선생님 스스로를 인정 못할만큼의 슬픔을 주지 않고 행복히 살아가실 겁니다. 원하는 만큼.

1월달 사연_2
I씨
9X년 X월 X일 시간 모름
소방과 미술 두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어디에 더 집중해야 세상에 이로울까요,
안녕하세요 만신님. 저는 소방관이기도 하고, 동시에 미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집이 가난해 빠른 취업을 위해 간호학과에 진학했다가, 이내 특채임용을 통해 구급대원이 되었는데요. 소방 조직에 들어와보니 구급대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 노조에 가입해 이를 개선하는 삶에 더 힘을 주어야 할지, 미술계 활동에 더 전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까진 미술이 세상을 바꿀 거란 기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직을 바꾸는 활동에 더 기대가 생깁니다. 물론 둘 다 할 수 있지만, 방향에 따라 제가 취하는 선택이 좀 다양해져서요. 어느 쪽이 세상을 더 이롭게 할 수 있을까요?
만신으로의 답변
선생님의 부적에 저기 두개의 네모가 있습니다.
부적에서의 사각형은 하나의 우주를 뜻하기도 하고 또 벽돌처럼 말그대로 하나의 부속품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여기 선생님의 삶의 네모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술가로써의 삶의 네모, 하나는 소방관으로써 그들 혹은 우리의 처우 개선에 힘을 쓰려는 삶의 네모.
어느 쪽이 더 세상을 이롭게 하냐구요? 제가 예술에 ‘집착’에 가까이 버리지 못하고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끝까지 함께 하고자 하는 이유는 가장 예술적이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말에 가슴이 확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정치와 세상을 가장 거리에 두는듯하면서도 가장 가까이 우리를 대변합니다. 예술이 가지는 풍자라는 금단의 열매에 정치는 절대 손될 수 없지요. 예술은 현실 반영이기도 해서 결국 지금 살아가는 우리를 표현하기에 예술은 그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호해야 하니까요. 서예의 글체에서도 뱅크시의 그라피티에서도 우리가 반영되었고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과 바람을 표현합니다. 심지어 꽃을 꽃는 예술에서도 꽃들의 의미와 형상으로 지금의 우리를 표현해 내죠.
선생님의 고민은 이미 마음이 기우셨고 노조가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꼭 현실참여를 하되, 절대적으로 미술이라는 도구를 지금의 현실을 알리는데 꼭 사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견해이니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마 납득치 못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삶에 충실하고 또 그것과 함께 충분히 예술의 정치적 장치와 순수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모두 다 가지고 계시고 이를 표현 해낼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두개의 네모 ‘예술’과 ‘현실’두 네모 사이에 이렇게
말씀 올립니다.
“ 그 모든 것은 빛이었다.”

피그헤드랩
www.pigheadlab.com
피그헤드랩 연말파티
기획자로서 피그헤드랩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한가지를 언급하자면 바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 쓰고 예술가들이 모여서 술 한잔과 함께 시끌벅적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번 오종원의 글 <어떠한 자리의 흐름에 대하여>에서도 언급되지만 제가 시각예술계에서 활동한 2010년 내외에는 정말 많은 자리가 있었고 다양한 이야기, 또 다양한 인연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 많은 공간들이 그런 기회를 만들고자 하기도 하였지요. 당시에만 해도 예술 = 술 = 낭만은 필수적인 공식이었다 생각합니다.
그러한 지점에서 피그헤드랩은, 어떠한 형식이든 전시를 갖는 작가들에게 리셉션을 갖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두사람이라도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자리를 가져보라고. 그게 피그헤드랩에서 행사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2022년 크리스마스 전, 피그헤드랩은 연말맞이 겸 크리스마스 파티를 가졌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많은 분들이 와 주셨고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피그헤드랩은 사람 간의 대화, 그리고 즐거움이 있는 공간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