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시각>_ Time Now
<지금 이시각>, 월간지 형식의 월간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획자 : 오종원, 발행 : 피그헤드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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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시각> 2022년 12월호, 참여필진 : 석민정, 오종원, 이안, 이은우, 이채연
신규 참가자 및 게스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 채 연
창작가 /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주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2022년 4월 25일 ~ 5월 5일)_1
지난 봄 스페인 여행의 몇 가지 기록.
해외여행은 늘 곁에 있어서 익숙해진 것들과는 다른 풍경과 공기, 사람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몸과 머리가 환기가 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새롭게 환기가 될 만한 시각적 자극의 경험은 중요하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서 해외여행은 많지 않다. 이 몇번의 소중한 경험이 잊혀 지지 않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미루고 있으니까, 머리 속 한쪽 구석이 가려운 느낌이 든다. 올해가 가기 전 꼭!
스페인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친구인 S작가의 전시회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있어서다. 친구의 전시진행스텝도 하고 관광도 할 겸해서 가게 되었다. 관광이 훨씬 더 비중이 있다. 헤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한창 유행할 때라 해외에서 코로나에 걸릴 위험도 있었고(해외에서 코로나 걸리면 치료문제도 있고 숙박, 항공등등 금전적인 손실이 크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떠나기가 미안해서 망설여 지기도 했다. 그랬지만 그 때는 항공권이 저렴한 편이 였고, 이 때가 아니면 이 멀고 먼 스페인에 언제 가볼 수 있을까 싶어서 가기로 결정했다. 언젠가 나에게도 해외 전시의(+지원금)기회가 온다면, 그 때는 가족들과 같이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일이 있을려나…하하
여행의 여정을 재미나게 쓸 자신이 없어서, 약간의 메모 같은 기록과 미술인이라는 본업에 충실히 하여 여행 중 기억에 남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남긴다.
본격 여행의 시작 - 비행기 : 카타르 항공 이용. 경유지인 카타르 공항에서 ‘장 미셀 오토니엘’의 조형물이 인상적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거대한 황금구슬. 부티(富)를 좋아하는 나라다운 조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잘 어울려 보였다. 여행 후 장 미셀 오토니엘의 전시가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 좌석 스크린에는 카타르 월드컵 광고가 많이 나왔다. 기내식은 향신료 맛이 나는 듯했다. 장시간 비행으로 허리가 아파서 경유공항에서부터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돈 많이 벌어서 비즈니스좌석이나 직항 타고 싶다.
비행기 기내에서 찍은 사진. 아래 산맥은 중동과 유럽 사이 어딘가로 기억한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파란 하늘에 노란색 점이 달이다. 달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달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숙소 : 마드리드시내에 위치. 에어비앤비로 예약했고 열흘정도 있었다. 숙소에 구비된 휴지가 리필이 안 되었다. 구비된 휴지를 다 사용하고, 슈퍼에서 휴지 12개 한 묶음으로 된 것을 사서 사용했다. 휴지 두 세개 정도 사려고 했는데 묶음으로 된 것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 에어비앤비 숙소에서는 소모품 리필이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휴지의 심지부분을 빼고 캐리어에 꾹 눌러 담아왔다. 기념품은 별로 없고 휴지가 가득한 캐리어. 예전에 부모님이 여행가시면 숙소에 있는 치약, 칫솔, 커피 같은 어메니티를 캐리어 구석구석 쑤셔 넣어서 챙겨 오신것이 생각났다. 차곡차곡 바리바리. 그게 좀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런데 나의 캐리어를 보니, 내가 더(구질)한 사람 같았다.
창문 맊으로 보이는 건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유럽한 느낌을 준다. 표현이 다소 억지스럽지만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나는 야~ 이런 외쿡풍경을 보고 싶어서, 머나먼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니까! 건물의 정원이 조용하고 소박하다. 마치 레고로 만든 것 같았다. 나무하나 꽃 화분 하나, 정원에 들어갈 소품 하나…. 무엇을 넣어야 할지 하나씩 생각하며 집어넣은 느낌 이랄까? 이런 창밖 풍경을 보며 식탁에서 커피와 빵을 먹었고, 그림도 그렸다. 하하
숙소 1층에는 카페가 있다. 새벽까지 사람들의 사교의 소리가 들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소리라서 그런가… 소리크기에 비해서 소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지의 낭만으로 여겨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꼭 잠을 재워야 할 어린아이와 같이 있었다면 괴로웠을 것 같다.


전시 : S작가의 <나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여행의 목적인 전시. S작가의 작업은 한복을 입은 여인의 일상을 전통동양화의 방식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작품속에는 인물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의 모습을 한 작은 요정들이 등장한다. 그 등장인물들이 그림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한 장면으로 마치는 그림이 아니라 그 다음이 상상이 되는 끝이 없는 느낌. 현재진행형(ing) 이다. 한국적인 재료로 그려져 있고 이야기가 있는 작품이라, 외국인관객들의 관심 있게 전시를 보았다. 훈훈한 분위기로 전시가 진행되었고, 반응도 좋았다. 내가 전시 작가의 매니져가 된 듯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의 마드리드 전시 기념으로, 마드리드의 상징 같은 그림인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Las Meninas)와 S작가의 그림을 오마주 한 그림을 그려보았다. 일차원적이고 간단한 오마주라 내 놓긴 민망하지만, 그릴 때 재밌었다. 이런 재해석 작업은 원작 작가가 휠씬 더 잘 그려내겠지만, 전시관람후기와 여행기념, 그리고 나만의 맛??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려보았다. 제목이 "스페인 공주, 한복 대여샵에 오다”쯤 될까나?
코로나로 예전에 비해 해외여행이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시국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로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고, 우리나라의 한복대여샵도 북적이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다음호에 두번째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은 우
그림 그리는 사람 / 본업과 부업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 중
어차피 결론은 또 전시 해야지-
어느 날부터 개인전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꺼려졌다. 이전에 19년도에 전시했던 곳에서도 개인전 타이틀이아닌 1인전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 시초였다. 어찌됐든 ‘개인’이 하는 전시이기 때문에 개인전인건데, 정말오롯이 작가 혼자 하는 전시가 아닌 이상은 대부분의 전시들은 조력자들이 있다. 특히나 이번에 진행한 전시도 그렇고, 기획자님 혹은 초대를 한 미술관/전시장이 있기 때문에, 어찌됐든 나 하나만이 아니라 타인과 전시 진행의 프로세스를 함께 하기 때문에 ‘개인전’이라는 타이틀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들 개인전을 어떤 방식으로 칭하고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시라는 것은 정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작과 끝을 작가가 계획해야 끝맺음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전시를 진행하기까지 타인들의 노력들도 많이 필요하다. 나같은 경우는 현재 작업하는 장소가 아닌 250km정도 떨어진 곳에서 전시를 했기 때문에, 정말 가까운 사람 아니고서는 보러오는 것 조차 어려웠다.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는 곳이었고 장소가 좋음과는 별개로 꽤나 맘먹고 와야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초대하기도 참 곤란했던 것은 맞다. 아니면 애초에 내가 그 동네에 상주하면서 쭉 전시장을 계속 오고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모르겠지만. 들인 시간과 돈(운송비, 작품비 등등..)에 비해 전시가 조용히 지나간 듯한 느낌은 확실히 아쉽지만 그럼에도 얻은 것이 있다면 꾸준히 하자는 마음가짐이다. 어찌됐든 나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봐주고 응원해주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비록 소수일지라도)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작품을 더 진정성있게 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가지 또 기억나는 일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눈인사와 통성명을 조금씩 해서 또 다른 커뮤니티를 접한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역시 재밌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그래 붓을 들고 작업을 해야지 엄한 곳에 에너지를 뺏기지 말자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되었다. 맨날 하는 자기최면과 같은 이야기지만.. 역시이런 마음은 같은 직종, 비슷한 부류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얘기를 나
누어야 답답한 마음이 해소가 된다. 마음 같아서는 참 여러가지 일을 벌이고 싶은데 막상 실천하자니 시간 투자 대비 결과가 좋지 않을까봐 이런저런 생각에 소극적이게 되고, 결국 마음을 다시 접고. 그래서 혼자만 낑낑대며 일을 하는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커뮤니티를 맺는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굳이매번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단순한 일이라도 맘 놓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 아무튼 전시 준비를 한다는 것은 일터에서는 절대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절로 풀리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비교적나 스스로에게 덜 가면을 써도 되고 더 진솔한 얘기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참, 이번 전시에서는 방명록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름만 쓰는 형식적인 방명록이 아니라 사연이 있는 방명록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내게 더 힘을 주었다. 방명록만 보더라도 관객의 비율이 예술쪽 관련된 사람들보다 정말 일반 관객들이 더 많이 온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훨씬 솔직하고 진솔했다. 고등학생, 가족, 익명의 누군가, 연인 등등 참 각기 다른 테마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전시장에 오래 있지 못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어떤 종류의 전시든지간에 매번 나를 도와주는 H, 지지해주는 가족들, 격려의 이야기와 쓴 소리를 함께 해주는 몇몇 지인들,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는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있기 때문에 이런 맛에 전시를 하지 않나 한다.
다음에는 더 확장되고 볼거리를 많이 주는 전시를 만들고 싶다.




너는 평소에 무엇을 하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 말은 즉 나의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는 이야기이다.
여지껏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만 어떤 규칙과 선을 지켜왔고,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혹은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조금이라도 드는 일이라면 무조건 뛰어들곤 했다. 계획이고 나발이고 딱히 그런 것은 재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과거 나의 대학 동아리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참이었는데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서 물어봐주었다. 계기... 계기는 특별히 없었다. 그냥 어렸을 적부터 그리는 것이 좋았고, 사람을 따라 그리면서 종이에 뭔갈 채우는게 좋았고, 덕분에 만화책도 열심히 봤고 다행인건 고등학교 근처에 좋은 전시장들이 많아서 그때부터 조금씩 전시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서 나에겐 너무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것이 당연했다. 주로 어떨 때 그럼 그림을 그렸느냐 하면 대게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의욕이 넘쳐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랑 혹은 좋아함을 인정받으려고 더욱이 열심히 그렸던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에도 그리는 행위를 지속해온 것 같다. 꽤나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한게 그림이다.
나는 말재주가 별로 없다. 낯을 많이 가리며 내 스스로는 사람들과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 지낸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좋다. 다대다보다 일대일 관계를 선호하고 꽤 오래 진중하게 만나며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야만 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굳이 어떠한 사회적인 태도를 전혀 취할 필요가 없는 그림 그리는 행위에서만큼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림을 전공으로 삼은지 몇 년 지나고 보니 작업하는 것 말고도 재밌는 것들이 참 많다고 느꼈다. 때로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이 작업한다는 말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쨌든 작업이라는 걸 제외하고 너는 평소 무엇을 하니? 뭐에 관심이 있니?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 있게 답할 것이 없다. SNS 업로드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를 정말 미친 듯이 파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동을 진득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온갖 종류의 술을 섭렵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카페 투어를 하며 커피 맛과 공간을 즐긴다? 그것도 아니고, 덕질도 안하고, 레저 좋아하니? 이도 아니고... 한마디로 깊게 빠져 있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꽤 적잖은 스트레스다. 그래서 한동안은 사람들에게(특히 작가들) 일 하는 시간 외에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여 매번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가장 강하게 빠져본 것이 있을까? 다 마지막엔 실증을 느껴서 금방 접어버렸기에 이렇다 할만한 게 없었다. 의욕은 강하게 오나 그 매듭을 끝까지 짓지 못하는 것이 탈이다. 그래도 지금 생각나는 것은 산책. 산책이 가장 즐거운 것 같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시선 지나가는대로 보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뱉어내고 흡수하기도 하는 그 과정이 가장 즐겁다.
나에게도 취미와 끈기를 다오.

이 안
원형아티스트 / 누가 뭐래도 세계에서 젤 잘나가는 만신
너가 점을 보겠다고?
22살? 집에 가. 우리 이런 거 하지 말자.
네? 저 직장인이예요. 돈 있어요. 그냥 해주시면 안돼요?
응 안돼 가, 너무 어려
네?
그니까 너가 한 사십정도되고 아님 닳고 닳아 더이상 닳을 생애도 없으면 그때 와 아니면, 너의 세상을 살다가 그 모든 이들이 너를 배반하여 더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그때 와도 늦지 않아. 너무 어려 그냥 가.
고집있는 아이. 삶이 너무 궁금한 22세. 세상의 누구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선생이 없는 이 시대에 너의 선택은 점쟁이를 찾는 것이었구나. 아이는 마냥 수줍어 머쓱히 웃기만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바로 나는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그래 그렇다면 약속해 줄 수 있겠니? 네 이십대에 최소 삼년은 우리 점 보지 않는다고 약속하자. 너가 그걸 지키겠다고 여기 신성을 갖춘 이곳에 약속을 한다면 내가 점을 봐 줄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다.
얘야 너 잠도 잘 못 자고 집안은 힘들었고 아픈 유년을 지냈구나, 그래 또 놀라지마. 나 점 본거 아니야. 22살에 생활인이 되어 직장을 가지고 90프로 이상 대학을 가는 이 나라에서 바로 취업전선에 들었다는 건 생활이 녹록치 않거나 너가 원치도 않았고 선택할 수도 없는 너의 가정 환경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취업의 길이 젤 빨랐을 테니까. 아직도 의심스러워? 난 점본 게 아니야. 자 봐봐, 너가 여기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많은 의미가 있단다. 세상이 궁금해서 찾아야 하는 곳이 이곳인 것에, 사회는 널 지켜 주지 못했다는 방증이고, 먼저 너의 시대를 지나간 나정도 연배의 이들이 너에게 미안해야 하는 거란다.
별나지? 미안해 근데 너의 돈을 받아 내 삶에 일이라도 영위를 하는데 쓰인다면 나는 정말 내 스스로 죄책감에 그리고 내가 이것 밖에 안되는 구나 싶은 마음에 가슴이 아플 거야 몇일은 앓아 누울 거야.
첫번째는 너 말대로 대학을 갈까 말까 해서 점을 보러 왔다고 치자. 만약 불혹의 누군가가 와서 대학을 4년을 고스란히 투자하고 끝나는 나이 45세, 그럼 이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너처럼 바로 취업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나라의 사회구조가 그렇니? 그래 아니잖아, 그럼 이 사람은 너에겐 옵션이 이 사람에겐 생을 건 모험이야. 그 나이에 대학을 간다는 건. 근데 너 22세, 대학 졸업하면 27세. 자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예시의 사람보다는 많겠지? 그래 이해 가지? 그런 이유에서야.
나는 너가 가지고 있는 ‘너의 가능성’을 좁히고 싶지 않단다. 내가 아무리 신의 대리자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의 목소리를 듣고 너에게 애기 해준다 한들, 그건 온전한 신의 목소리가 아니야, 인간인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견해로 너에게 전달이 되겠지. 나뿐만이 아냐 어떤 식의 점을 보고 어떤 식의 해석을 듣든지 그건 중간에 해설해 주는 이의 역량이나 사고에 따라 너의 운명이 일차적으로 제단이 된단다.
얘야. 22살 가능성아. 나는 너의 우주보다 더 넓은 수많은 기회와 성취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수한 것들을 지닌 너에게 ‘나의 언어’로 너를 ‘재단’하고 싶지 않구나. 원석에 내가 감히 뭐라고 정을 가져다 대고 망치로 내리칠 수 있겠니. “ 너.의.삶.인.데.”
두 번째로 자 보자, 너 신기 있다는 소리 들었지? 그래 놀라지마. 22살에 6개월을 예약을 하고 점집을 기다릴 수 있는 배포면 누구도 나처럼 생각할 수 있어. 22에 연애를 하고 미래가 궁금하면, 캐주얼 한 곳에서 가볍게 여흥의 개념으로 점을 보지 이렇게 정식으로 점을 보겠다며 다닌다는 건 이런 문화에 노출이 많이 되었다는 소리야. 그런 어린 아이가 영적인 것에 많으니 단순하게 ‘신의기운’ 이 있다고 단정짓기 딱 좋지 않겠니. 상식, 그러니까 공통적 함의된 생각이니, 이것도 점 본거 아니야 놀라지마. 세상에는 낮이있으면 밤이 있듯 너의 그 가능성을 볼모로 잡아, 그것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너를 신기 있는 사람으로 가둬버릴까 나는 겁이 났단다.
너는 신기가 있는 게 아니야, 너가 지금 까지 살아내면서 무수히 해석할 수 없는 일들과, 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의문의 시간을 버텨내며 밤에 별빛을 가로등 삶아 살아온 너이기에, 많이 예민하고, 불안했기에 안정을 찾기위해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삶을 ‘영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살아왔기에 신기있는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란다.
신성성이 모든 이들에게 부여되지만 아무에게나 삶의 십자가로 메달고 살수는 없는 거란다.
나 화장실 다녀 올 테니 그 사이에 고민해봐. 그 사이 그냥 나가도 돼. 자 돈봉투 여기 있어. 이제 너가 결정할 차례야. 너라는 존재를 존중해 줄 수 있는 나의 마지막 배려란다. 잘 생각해봐, 이번이 최소한 20대 중반이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점이라고 약속할 수 있다면 봐 줄게.
좀더 직접적으로 말할 게. 여기저기 점집을 돌아다니며 오지도 않는 미래를 들으며 너의 삶의 길을 점점 좁힐래, 아님 이번이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점을 보지 않을래, 아님 바로 여기서 나가, 나도, 다른 점집도 찾지 않고, 너를 위한 삶, 너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 볼래. 나는 맨 마지막 제안을 너가 받아 들이길 바라.
아이는 한참을 어색해 하며 웃음이 울음같기도하다가 아이의 눈망울이 복잡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아이를 응시한다. 그리고 너의 위대함에 그 가능성에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너를 만나볼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고 부디 너도 스스로 인지하기를 전전긍긍했지만, 혹여 그래도 애써 냉정한 척 웃지 않고 나는 너의 눈을 바라보는 나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
부적 프로젝트_3
편집자 : 2022년 9월호부터 이안 필진의 신규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매달 사연을 받고 그 사연에 대해, 이안 필진이 만신으로서 답변과 이에 따른 부적을 제작해 드립니다. 종교 혹인 신앙의 측면에서 부적이란 것에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나, 본 작업은 이안 필진의 전통 계승 및 독자적인 해석 차원으로 창작의 측면이 강하며 또한 받아들이는 분들께서도 이것을 부적은 물론 자신의 소망을 위한 심볼, 도상, 기하학적인 무늬, 작품 등 상징으로 해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매달 1~3명 내외, 익명으로 된 사연을 피그헤드랩에서 취합 후 이안 필진에게 보내는 방식이며 본 과정을 통해 제작된 부적들은 먼저 이미지로 사연자에게 전달되고 이후 취합하여 전시로 제작할 계획입니다. 전시 종료 후 부적들은 사연자들에게 배포될 예정입니다. 이는 진행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본문에 게시된 사연은 일부 각색된 내용입니다.
12월달 사연_1
F씨
8X1XXX / 아침 X시
나이는 먹고 있고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이룬 게 많이 없는 느낌입니다. 항상 제자리인 것같은 느낌이고 허무함이 많이 듭니다.
계속 하던 공부를 이어가 박사 과정으로 진학해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내 욕심인가 싶고 공부를 더 한다고 해서 내인생이 크게 바뀔것 같지도 않아요. 원래 안정적인 전공이 아니라서요. 지금도 안정적이지 못해서 뭔가 이루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지란 생각도 듭니다.
특히 30대 넘어서 하는 일을 바꿨습니다. 전공이랑 연결은 되는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늦은 감도 있습니다. 이 선택이 잘한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분야의 미래가 어떨지 모르겠어요, 직업적이던 가정적이던 빨리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신으로의 답변
늘 돈이 문제죠, 그래요 돈이. 사회적 지위=돈은 쌍둥이처럼 함께 다니면서 그것을 갖지 못하거나 그것에 향한 열망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마치 이 세상의 들러리처럼 보이는 시대를 한탄 해보려 해도, 우리는 결국 자본주의, 캐피탈리즘 속에 살고 있는데 그저 벗어날 길이 막막합니다.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대학원 다니면서 한 달에 100만원만 딱 벌고 평생 공부하다 죽었음 좋겠다했어요. 뭐 지금은 이렇게 만신이 되어 말 그대로 바람으로 끝났지만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삶을 잘 생각해 보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계획 보다는 직감으로 삶을 선택해 왔을 거예요. 하지만 세월이 들고 나이가 있다고 생각이 드니 주변에서,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자꾸 압박을 주는 거죠. 그래도 남들처럼, 남들만큼. 그만큼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돈 버는 것에 관심도 없는데 그것을 안 하면 부적응아가 될 것 같은 생각. 낙오자 일지도 모른 생각. 그것들이 선생님을 갉아 먹고 이 고민과 우울의 수렁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의 선택과 그 방식은 언제나 옳았어요. 그래서 빛났었고 지금도 빛나지만 스스로 감추려할 뿐이죠.
처음 꿈꾸었던 그때 기억나세요? 기억이 나지 않으시면 끄집어내세요. 그리고 그때의 첫 떨림과 열정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길 바랄게요. 그리고 제발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시길 권해 드립니다. 이 자본주의의 세계에 타고 나길 체계화 되지 않는 사람이자, 그렇게 살면 더 힘들어 질 것이니까요. 하고 싶은 것만 부디 끝까지 (매우중요) 끝까지 해봐요. 하고 싶은 것을 해 왔고 그것에 결실이 바로 보이지 않아서 답답할 뿐이지, 선생님께서 한 선택은 이미 선생님이 원해서 한 것이고 너무 잘하셨으니 오로지, 끝만 내면 되는 것이니. DIGGING! 해봅시다.

12월달 사연_2
G씨
198X년 X월 X일 XX시
안녕하세요.
미술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한 부적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미술 작업을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 꿋꿋이 그 세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길을 흥이 나게, 길게 오래오래 나아 가려면 사회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사회의 인정이란 주변인의 칭찬과 격려, 동료, 상장, 지원금, 기회 등등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더욱 인정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작가들도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 인정받기 위해 각종 평가를 이제까지 받아왔고, 앞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가에서 결과가 좋지 않거나 다른 작가들과 비교가 되면 마음에 상처받고 헤어 나오기가 힘들어질 때가 많습니다. 거기다 이렇게 마음의 상처가 쉽게 생기는 약한 멘탈도 다시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더 좌절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는 “실력을 쌓으면 된다”는 진리 같은 해결책이 있긴 합니다만…… 그 전에 유약한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어요. 요즘 따라 더 지치고 가슴이 구멍 난 듯 휑한 느낌입니다.
제가 마음을 잡고 작업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의지와 믿음을 주는 부적을 부탁드립니다.
겸허한 느낌으로 썼지만, 사실 솔직하게 “대박작가가 되는 부적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쓰려다 말았습니다. 쉽게 요행을 기대하고, 부적이 행운을 쉽게 얻어내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차마 그런 부탁은 못 드리겠더라구요. 이건 제 마음속 정직한 세포의 생각이고…. 저쪽 저 아래에 있는 속물세포는 대박작가가 되는 운을 쬐금 넣어 주세요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하
은혜로운 부적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신으로의 답변
무력감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잘해봤자 용한 무당이고, 못하면 돈 밝히는 사기꾼의 경계. 게다가 어차피 무당이라는 주홍글씨로 평생을 살아야 해서, 연애는 12년 전이 마지막이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도 어렵다는 누군가의 조용한 조언에 묵언.
“다른 무당들은 잘도 만나 결혼하고 애 낳고 잘 먹고 잘 사는데 너무 오버아냐?”
맞아요. 그렇게 살아도 되어요. 하지만 전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어떤 분은 자신의 자재 분이 저에게 호감을 가지니 그 뒤로 그 자재 분과 절대 같이 오지 않더군요. 사실 결혼할 마음조차 없거든요. 내 자식이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아서요. 제가 사는 삶이 저는 축복받은 삶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요.
게다가 저와 같은 직종(?)에 계신 분들 사이에서 버텨내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견해의 차이, 말 그대로 각자의 잣대로 끝도 없이 비교하며 내가 지켜가는 신을 모시는 방법에 대안 없는 비판만 쏟아내는 그들 사이에 지쳐 더 이상 너덜거릴 것도 없는 멘탈을 잡으려고 조금씩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게 되었어요.
신을 모신다는 것이 나에게는 하늘이 주신 선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일 뿐인데 왜 나는 이 사회에서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리그’에서도 배제 당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나 싶어 ,살며 받은 상처가 아물고 또 생기고를 수없이 반복하다 아무는 속도가 이제는 너무 더뎌져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처음에는 도피였어요. 도망이었지만 또 다시 상처가 나더라도 덜나게 방법을 찾아가며 버티다 보니 결국은 전 만신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죠. 그제야 내 분야에서 최고이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을 받아드리고 이 먼 타국 까지 제가집이 굿을 하러 오시고, 얼굴 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인연들을 보고서 그‘도피’를 신과 함께하는 이 축복을 많은 이들과 더 크게 나누기로 결심했어요.
지금은요 항상 정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는 마음 어디쯤, 열대의 어느 나라의 새벽에 컴퓨터 앞에 앉아 선생님이 보내주신 사연을 읽고 또 읽으며 마음속에 새겨보고 있네요.
선생님,
선생님의 사연을 받고 어떤 감정으로 그랬는지 아직도 해석이 되진 않지만 많이 울었어요.아마도 선생님의 사연에서 느껴지는 솔직함과 저를 진지하게 존중해 주시는 마음과 더불어 이렇게 진심을 보여주신 용기에 저의 마음이 절절해졌을까요.
아니면 삶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두려움’에 지쳐 있는 저에게 선생님의 진심이 담긴 사연이 제 등을 토닥토닥 얼러 만 줘 주셔서 그랬을까요.
선생님. 그거 아세요?
속물세포는 모두에게 있는데 그것을 인지하고 사는 이는 별로 없어요, 현세기복의 정점에 서 있는 나로썬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 속물세포가 이 사회와 선생님이 활동하는 리그에서는 필수조건입니다. 요행이 아니에요. 당연히 가지셔야해요. 잊지 마세요. 속물세포 속물욕망은 인생의 필수 조건. 실력과 ‘운’은 정비례 하지 않아요. 그래서 부적이 생겨난 연유라고 생각해요. 이를 인지하셨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부적을 처음 쓴 적은 6살 혹은 7살 때 일거에요. 종이에 연필로 부적을 그려 문에 붙여 놓았다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도 기억날 만큼 엄청나게 혼났어요. 차치하고 40년 못되는 부적인생에서 선생님 부적을 쓰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진심에 저도 온 마음 다해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각종 부적책을 뒤져가며 종교와 나라를 넘나들며 찾아봐도 내 마음에 차는 부적도 없었고요. 그래서 신들께 물어보고 또 생각하다 모은 내 손을 무심히 쳐다 보다 선생님의 손을 화경畵鏡으로 보았어요. 그제야 부적을 찾았다 싶어. 마음이 뭉클해 졌어요. 그렇게 탄생한 이 부적 쑥스럽지만 온 마음 다해 내밀어 봅니다.
선생님, 수십 년 누군가의 이름들을 대신해서 빌어 왔던 나의 이 손, 그리고 그렇게 빌어 그 무엇이 하늘에 닿아 누군가를 살려냈고 누군가는 그 원願이 이루어졌고 누군가 또한 인생의 고비를 넘기게 한 이손. 정하지 못한 틈에서 정함을 찾아 빌고 빌었던 제 손을 부적으로 담았습니다.
생물학적 남자들의 손에 비해 참 손이 작죠. 그래도 그간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을 작은 손에 비해 수없이 이루어 낸 제 손을 이렇게 빌려 드릴게요. 중요한 시기에서, 칼과 방패임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내년부터 작가로써 참가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참가 하시고 경쟁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저는 ‘만신’이듯, 선생님은 이제야 빛날 때가 찾아올 결국은 ‘작가’시잖아요. 내년부터 대박이라 불리는 일련의 일들이 눈앞에 펼쳐 질 테니 많은 준비가 필요할겁니다.
위의 일들을 위해 저도 함께 기원할 것이고 이 부적도 한 역할을 할 거에요. 하지만 이것은 대박으로 가는 디딤돌. 선생님이 갈고 닦고 지켜왔던 작가정신을 담아 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꾸준히 하던 대로 하세요. 어쩌면 선생님은 단지 디딤돌이 필요한 시기였을 겁니다. 여기 제가 되어 드릴 테니 다만 먼저 속단하고 참여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저렇게 구구절절 저의 이야기를 한건 내‘손’의 가치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나누고 싶었어요.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아직도 저는 해매고 있고 불면증으로 다녀온 정신과의 영수증에 한숨 쉬지만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 선생님처럼 진심을 다할 수 있다는 것, 그도 자기의 생을 날 것의 그대로를 담담히 열어 보여주며 ‘함께’ 대박의 욕망에 천착하자고 ‘꼬셔보려고’서론이 길어 졌네요.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팩트로 선생님이 저보다 먼저 대박이 나실 겁니다. 자 그렇게 되고 나시면 제가 헤메고 있을 때 저에게 선생님의 손을 그려 주실 수 있으세요? 조심스러우면서도 담대하게 부탁드립니다. 저 자신도 선생님의 손을 보며 디딤돌 삼아 바람 넘치고 세찬 가슴에 내리는 비가 멈출 수 있게, 그리고 대박의 욕망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요.

오 종 원
문화예술인력 / 피그헤드랩 운영
2022 부산 비엔날레 후기
부산을 방문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국내에서 시각예술에 일가견이 있거나 연결되었다고 느낀다면 부산 비엔날레 또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건너 건너 이런저런 해프닝도 간간이 들어는 왔지만, 이러나 저러나 결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행사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부산 비엔날레가 가진 장점이 여행지로써 괜찮은 부산이란 도시에 열린다가 제일 우선순위지만 그 다음으로 광주 비엔날레보다는 조금 가볍고 경쾌하게 느껴진다는 것, 또 부산 원도심을 배경으로 자꾸 무엇인가를 시도한다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바이다. 아무튼 올해도 비엔날레가 열렸고 휴가를 이용하여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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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결위의 우리>라는 타이틀을 SNS를 통해 먼저 보게 되었을 때 제목 잘 지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얼마나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제목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부산이란 도시는 가볍게만 떠올리더라도 워낙 특색이 많고 다양성을 갖춘 곳인데, 거기에 물결 위라는 표현은 항구 도시, 다국적의 문화, 급성장의 역사, 그에 따른 전통과 현대의 갈등 등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끔 해준다. 재미있게도 곧 개최될 광주비엔날레의 제목도 물이 들어가는데, 다양한 위기를 논하고 급변하는 세계정국, 그에 따른 인간에 대한 자성과 고찰이 높아져가는 요즘 같은 시대 물이란 개념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가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비엔날레의 입구에는 대형작품이 설치되어 관객을 맞이하곤 하는데, 이것이 그 해 비엔날레의 정체성으로 관객들에게 제일 먼저 던지고 싶은 한마디라고 생각한다. 비엔날레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그런 것이던가. 이번 비엔날레의 첫 대면 작품은 바다의 물결을 형상화한 듯한 대형 회화, 항구도시의 이미지를 내포한 듯한 대형 설치작업이었다. 올해 작품의 경우 개인적으로 다소 밋밋한 느낌이 없지 않아서 조금 심심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 지난 작들이 간혹 다짜고짜 시각적 충격을 던지는 감이 없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느껴졌다. 관객들이 가질 수 있는 비엔날레의 감상과 주제의식을 다소 덜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3. 개인적으로는 다큐멘터리 성향이 강한 작업을 좋아하다 보니 이번에도 그런 작업들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제일 인상깊었던 작업은 히라 나비의 <땅의 경계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들>작품이었다. 거대한 화물선이(심지어 한국 배라 커미션 작업처럼 느껴 지기도 한) 머나먼 타지의 땅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손에 분해되는 일종의 순환과정이 적당한 길이의 영상으로 보여지는데, 전반적으로 황토색 혹은 주황색으로 일괄된 톤이 건조하되 적당히 꽉 찬 느낌으로 배경을 채웠고 배의 부품들이 조금씩 분리되어 가는 과정(전반적으로 부품이 떨어져 나가며 웅장함을 연출하고), 노동자들이 특별한 안전장구 없이 배로 기어 들어가는 장면 등으로 크게 구성되었다. 설명상에는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하는데, 사실 이는 직접적으로 코멘트를 따기보다(물론 없지는 않았지만) 사슬을 기어오르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을 통해 조금이나마 연출된 것 같다.
이 작업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크게 어떤 특정한 문제를 너무 도드라지게 긁어내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배의 허물어짐이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숭고하게 느껴질 만큼 화면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면에 잡히는 현상들에 대해 굳이 하나하나 물고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비엔날레 출품작들 중에는 의례 사회적 현상과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어, 고발이나 독백을 통해 직접 언급하는 작품들이 꽤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작품들이 통쾌하거나 경각심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계몽의식, 심할 때는 선민의식과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다. 예술이라는 장르 특성상 어쩔 수 없을 수도 있겠다만… 본 작품이 그러한 장르에 속해 있나 하면 그건 또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야기라는 것이 꼭 말의 형태를 띄지 않더라도 감각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작업이 또 없을 것이다.
비슷한 관점으로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의 리서치 아카이브 작업도 좋게 보았다. 사실 이러한 리서치 및 커뮤니티, 아카이브 작업을 어떻게 분류하고 설명해야 할지 아직 어려운 감이 있지만 어촌(단도직입적으로 해녀나 물질 하는 할머니가 떠오르는)의 이야기를 소개하듯 선보이는 리서치와 설치작업들은 진솔함, 진정성 같은 것이 느껴지기 좋았다. 역시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어떤 사라져 가거나 소외되는 문화에 대해 문명화된 우월적 시선으로 대상 집단과 데이터를 내는 경우에 불쾌감을 간혹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 나에게 그 경계는 조금 추상적이긴 하나 굳이 방법적으로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리서치를 진행한 작가가 그 이야기를 수집 후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과정의 비율 같은 것이다. 특히 수집된 이야기가 많이 각색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화자의 입장을 배려하여 보는 이들과 함께 공통된 긍정적 미래를 지향하는 과정 등이 대체로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리서치 아카이브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해당 작업을 보며 나도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4. 앞선 말한 모종의 불쾌감과 경계심이 생기는 이유는, 부산 비엔날레에 오면 꼭 이런 작업들을 하나씩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외국인 작가들이 “내가 처음 상상했던 부산은(혹은 어떤 도시라도) 이러이러했는데~ 직접 와보니 달랐어요~” 라면서 거리의 쓰레기 등을 수집하거나 길거리를 자기 방식대로 스케치하는 등의 작업들이다. 이런 작업들은 먼저 가벼운 것도 가벼운 것이지만, 무엇보다 서구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오리엔탈의 정의가 간간이 느껴지는 것이 문제이다. 어쩌면 내가 오버하는 지점도 분명 있겠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경계와 갈등, 차별과 공평하지 않은 역사 등이 판치는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그렇게 생각이 귀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과거의 레지던시나 다른 지역을 이동하다 보면 결국 공간적 비교의 관점이 먼저 생기기는 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나 실수를 통해 내 자신의 시선과 발언이 상대에게 결코 단순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란 걸 느끼고는 한다.
5. 비슷한 느낌으로 샌디 로드리게스의 회화 작업과 슈 차웨이의 <사무라이와 사슴>, 마르완 레치마위, 아르투로 카메야의 설치 작품을 재밌게 보았다. 각기 자신이 속한 문화권이 얽매인 과거의 상처와 작금의 문제를 인지하는 지점 등을 생각해보는 차원이었다. 샌디 로드리게스와 슈 차웨이의 경우 그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회화와 다큐멘터리) 역사를 풀어내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하여 대체로 솔직하고 진솔하게 접근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인과를 보여주는 것에 있어서 너무 심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감각의 유지를 보며 테크닉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완 레치마위 의 경우 지극히 애도의 기념비로 공간을 구성하였는데, 베이루트 항구 폭발사건이라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의 진정성에 대해 예술의 기능성과 탐미성에 대해 어떻게 구분하고 관점을 가져야 할지 조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방식과 구성에 있어서는 다양한 생각이 들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솔직하고 진솔하게, 기념비와 알림의 역할을 잘 하였다고 생각한다.
6. 의외로 크게 잘봤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우암 작가이다. 개인적으로 회화를 보고 만족하는 경우가 극히 적은데, 방 안을 가득 채운 작품들의 나열은 담담하면서도 디테일이 높았으며, 여기서 디테일이란 리얼리즘의 세밀함이나 큰 화면에 작은 피스들이 가득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덤덤하지만 넓고 깊은 감각들로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그림 한점 한점이 가진 적당한 무게감은 그것이 꼭 작가 본인으로 투영하지 않더라도 당대에 부산을 살아갔던 이들의 이야기, 나름대로의 역사들일 것이라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물론 작가의 정보(나이)가 적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상상들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화면 구성의 경우에도 앞서 화려한 기교나 기운을 뿜기보다 알차고 성실하게 화면을 채우는, 그러면서 소소하게 자신만의 위트를 삽입하였던 장기간의 이야기들은 한 톤으로 구성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간만에 감동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경험이었다.


7. 이번 비엔날레의 아쉬운 점을 언급하자면 우선 전시장 전체적으로 조도가 너무 어두웠다. 이건 호불호의 영역일 수 있고 또 특정 섹션의 경우 명암을 장치화 하려 한 것은 알겠으나, 전반적으로 너무나 어두워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눈이 아프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피로감을 통한 통증이었고 그것은 같이 간 지인도 마찬가지였다. 감상 시간이나 방법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비엔날레에 비치된 수많은 텍스트들을 읽어가다 보면 전시장의 어두움으로 인한 감상의 불편함은 확실히 있었다.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부 지역 작가의 작품 완성도가 매우 아쉬웠다. 지역발굴에 따른 우대 차원 정도라 생각하면 매번 한번씩 느껴지는 아쉬움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또 여전히 을숙도에 대해서는 부산시는 고민 좀 했으면 좋겠다. 나름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지만 지금의 을숙도는 교통이 편하거나 비엔날레와 연관하여 무엇을 경험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계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본다.
전반적으로 비엔날레라면 응당 있을 법한 작품들의 나열이며 현시대를 잘 정리한 글로벌 뉴스채널 같은 느낌이라 생각했었다. 크게 기억에 남는 것만 하여도 환경, 집단, 젠더, 소수자, 유랑, 노동, 역사, 지역성 등 근래 이슈가 될 만하거나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이야기들이 등장하였는데(물론 개인적으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좀 나왔으면 했지만) 혹자는 이렇게 구성하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단순히 작품 하나가 좋았다 아쉬웠다를 떠나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잘 잡히고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다고 느낀다. 덕분에 이번 부산 여행은 좋은 기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석 민 정
삼십대 / 문화예술인 / 교습소운영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_5
ep. 15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이
주말에 실컷 자고 늦은 오후가 되서야 일어나면
나는 입맛이 없어 멍때리고
그 애는 조용히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온다.
일어나자마자 단게 입에 들어가? 하면
머쓱해한다.
단걸 좋아하는 아이.
몽쉘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
아이스크림을 한 통씩 먹는 아이.
내장지방이 대단한 아이.
나온 배를 보고 시무룩한 아이.
어느 날 그 애의 본가에 놀러가 옛 사진을 뒤지다 튀어나온 사진 한 장을 보고
폭소가 터져나왔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어린 그 애의 사진
졸린 듯 반쯤 감은 눈
아이스크림은 녹아 흐르는데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꽉 쥔 고사리 손
웃기고 귀여워 그 사진을 가져왔다.
사진을 보며 이 귀여운 금쪽이가 내꺼라니 하며.
볼 때마다 세포가 행복해진다.
이제 다 큰 아저씨가 되어 불룩 튀어나온 뱃살을 자랑하며
일어나자 마자 아이스크림을 꺼내오는 모습을 본다.
나는 혀를 끌끌 찬다.
근데 또 가만 보고 있으면 아이스크림 먹는 아저씨 얼굴 위에 어린 금쪽이 얼굴이 대입되
괜히 사랑스럽고 귀엽다.
10년이 됬는데,
콩깍지가 아직도 안벗겨졌나보다.
아직도 이 아저씨가 귀엽다니.

ep. 16 기적의 파란장미
2016년 여름 나는 그 애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헤어졌다기보단 내가 포기했다는 쪽이 가까웠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그때, 나는 우리의 관계가
내가 줄을 놓으면 바로 끊어지는 관계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 후로 그 애는 매일 나를 찾아왔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직장 앞에서도 기다렸다.
아끼는 신발을 팔아 돈을 만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샀다.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나는 그 즈음 너무 지쳐 다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안된다고, 오지 말라고 계속 그 애를 밀어냈고
그 애는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우리의 이 힘든 과정은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날 일이 끝나고 나오니 또 그 애는 여기까지 왔다.
손에는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꽃 한송이만 받고 싶다 해도, 절대 선물해주지 않던 그 애가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수줍게 서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어색하던지.
“왠 꽃이야?”
“그냥..”
수줍게 내민다.
감동받으려는 찰나에 무심코 쳐다본 꽃다발이 너무 촌스럽다.
가운데는 반짝반짝 펄이 뿌려진 파란장미 다섯송이,
파랑장미를 둘러쌓고 있는 스물 한 송이의 빨간장미.
화려한 포장지.
당황했다.
“어디서 산거야...?”
“안산에서”
“안산에서 여기까지 들고온거야? 지하철타고?”
“응..”
웃음이 터졌다.
그 아이는 엄근진하게 얘기한다.
“민정아 파란장미의 뜻이 뭔지 알고있니?”
?
“파란장미는 기적이래.. 우리가 사귄 5년이 난 기적이라고 생각해.”
“그럼 빨간장미는?”
“민정이 나이가 26살이니깐... 우리가 만났던 5년은 파란장미, 나머지는 빨간장미야”
“......”
자기도 촌스럽고 오글거리는 걸 아는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감동보다는 마냥 웃겨 둘이 깔깔대며 거리 한복판에서 웃어댔다.
“얼만데!”
“오만원...”
“미쳤니? 그 돈이면 닭발을 사주지!”
“넌 이런 상황에 그런말이 나오냐...”
“오만원주고 이런 촌스러운 꽃다발 사오기도 힘들겠다ㅋㅋㅋ”
우리는 깔깔대며 걸었다.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 했다.
치킨이나 먹으며 우리는 센스없는 꽃가게 아저씨를 흉보며 또 깔깔 웃었다.
나는 파란장미를 유리병에 담았다.
짐을 정리할 때마다 보이는 마른 파란장미를 볼 때마다
그 내성적인 아이가 없는 돈 털어 산 촌스런 꽃다발을 들고 부끄러워하며 지하철 안에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기적의 파란장미가 끌고 온 우리의 10년.
기적이 일어나길.
ep. 17 옥탑방과 300만원
그 형 9년 사귀고 헤어졌대
왜?
여자친구가 자기는 300이상 버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대
헐…. 너무 잔인하다…아직 한창 작업할 때잖아
그러니깐…
대학원 동기 형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거 필요 없어. 나는 탁 트인 옥탑방에서 오빠랑 애기랑 고양이랑 강아지랑 살거야.
둘이 같이 300만원 벌면 되지. 150씩.
우리 애기랑 고양이 한 마리랑, 큰 강아지 한 마리랑 행복하게 살고싶어!
서로 작업 응원도 해주고… 맛있는 음식 해먹고 행복하게 살자.
몇 년 후 술자리에서 기혼인 한 작가님 왈
“300만원? 그거가지고 애 못키워요… 절대 결혼 못해요.”
나는 술이 올라 발끈했다.
“저는 할 수 있어요. 더 없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잖아요! 우리 엄마아빠는 더 없이 삼남매를 키웠는데, 저도 할 수 있어요.”
나는 자신 있었다. 없는 것을 낭만으로 생각했고, 몸이 튼튼했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나도 자꾸 변했다.
아무것도 없이 둘의 사랑만 볶아먹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애기 낳고, 행복하게 키워줄 수 있을까?
출산 후 외벌이로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걸까?
현실적인 문제들이 자꾸 밀려들어왔다.
다시 재결합을 고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애에게
“네가 300만원을 벌지 못하면 우리는 결혼할 수 없어.”
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포기할 수 없는 것 들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옥탑방보단 샷시 잘 된 아파트 로얄층에 살고 싶다.
내가 일하던 비싼 미술학원 교육을 내 아가한테도 시켜주고 싶었고,
고민하지 않고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육아를 하며 내가 일을 못할 때에도 생계걱정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깟 300만원이 뭐라고…
누구에게는 하찮은 돈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결혼할 수 있냐 없냐의 무게를 지닌 300만원이었다.
천근만근보다 무거운 300만원의 길, 그리고 조건 없는 피터팬 사랑.
나는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저울질한다.

피그헤드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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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을 마무리하며
2022년 말에 예정되었던 두 개의 전시를 연기하고 나니, 피그헤드랩은 올해 4개의 전시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4개의 전시는 터닝포인트를 통해 모집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한 4명의 작가분이 힘 써준 전시입니다. 먼저 올해 전시에 함께 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4개의 전시는 사실 많은 횟수는 아닙니다. 횟수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공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공간이 빈다는 것, 더욱이 피그헤드랩은 기획자 오종원의 기회비용만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스케줄이 잡히지 않으면 휴식이라는 생각보다는 너무 놀리고 있지는 않나 걱정이 먼저 앞서고는 합니다.
피그헤드랩은 크게 공모를 바탕으로 하는 워크샵 및 전시 지원 프로그램인 <터닝포인트>을 정규화 하고 있으며 그 외에 다양한 커뮤니티 및 공간 지원 프로그램을 목표로 하고자 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영향도 분명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신생공간인 만큼 인지도에 대한 아쉬움과 또 제가 피그헤드랩의 기획자이면서 동시에 타 기관 소속 기획업무를 병행하는 만큼 운영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피그헤드랩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작가님, 정말 우연히라도 방문해주시는 관객분에게 감사함이 큽니다. 특히 올해에는 이규환 작가님, 이선환 기획자님 덕에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23년도에는 가능한 다양한 커뮤니티 기반 프로그램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정규적인 아카데미 형식의 시각예술 뿐만이 아닌 다양한 방식에서의 예술로의 도입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는 다양한 기회비용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인프라 또한 중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꼭 깊은 의미나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좋으니 피그헤드랩은 많은 분들의 접근을 환영합니다. 항상 차와 주류는 끊이지 않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