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개인전 <애실愛室>_20240713-20240803
김준범 개인전 <애실 愛室>_
참여작가 : 김준범 / 공동기획 : 피그헤드랩 / 사진협조 : 덕스리그 (이규환)
2024년 7월 13일부터 8월 3일까지 / 운영시간 : 12:00-20:00 / 유인 혹은 무인 운영
1) 아티스트 토크 : 7월 13일 오후 3시
무아레 서점https://www.instagram.com/moire_books/
2) 오프닝 리셉션 : 7월 13일 오후 5시 / 피그헤드랩
- 애실 전은 아티스트 토크와 오프닝 리셉션이 함께 진행됩니다. 7월 13일(토), 오후 3시 무아레 서점에서 아티스트 토크 진행 후 피그헤드랩에서 오프닝 리셉션이 진행됩니다.
무아레 서점과 피그헤드랩은 약 500m거리에 있습니다.
전시를 보며 남기는 메모
나는 <애실>전의 오프닝 리셉션이 끝나고, 작가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어떤 느낌을 받을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대체로 많은 작가들이 전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많이 허무함이 밀려온다고 한다. 나도 경험한 바가 있어, 리셉션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작가의 뒷모습에 묘한 무거움을 느꼈다.
사실 기획자이자 작업을 하는 이로서, “이 사람의 작업은 외로움에 기반합니다”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뻔한 것이, 외로움이야 모든 창작에 기반이 되는 스테디 셀러이기 때문이다. 밥의 주 재료는 쌀이라고 굳이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업을 보게 될 때에는 별로 할 말도 없고, 웬만큼 깊이가 있는 작업이 아니고서는 대체로 비슷한 소감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외로움은 인류의 평생 과제 같은 것인 만큼 어지간히 표현만 하여도 공감대의 호소는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피그헤드랩에서 <애실>전이 열리게 된 계기에는, 작가인 김준범의 외로움이 유니크한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 한국사회에 아직도 도전적인 한 지점으로 여겨질 그것을 누구보다 작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괴롭힐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정작 자신이 사랑받기 위한 도구로서 계속하여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 자체가 그만의 고유한 전략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상처와 관심의 사이에서 아슬하게 줄을 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작가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돌리는 과정 중이었다. 사실 포트폴리오만 봤을 거라면 그저 적당히 잘 그리는 작가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는 자신이 가진 특수성을 매력으로 어필하고자 하였고, 그렇게 해서 빨리 기회를 갖고자 했다. 나름 간만에 보는 당돌함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고 그게 지금의 전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가 처음으로 도전하는 오브제 작업(그는 이를 조각이라 표현하였는데,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6점과 아티스트 토크를 준비하며 녹음한 미디어 작업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를 준비하며 기존의 작업과 결을 달리해 보자는 제안을 그는 성실히 또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는데,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던 나의 생각을 웃도는 듯 그의 신규 작업들과 아이디어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나 외로움을 스킨쉽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표현들은 간결하고 담백하게 와 닿았는데, 마침 아티스트토크를 진행하며 그가 보여준 과거 연구작을 보게 된다면 이게 얼마나 큰 발전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프닝 리셉션 전 진행한 그의 아티스트 토크에서는 그의 외로움이 나름의 여정과 상처들 속에서, 자칫 위험하고 불안정하게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지금도 한참 젊은이이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그의 작업들은 (비록 불가피한 상황일지언정) 힘의 논리를 통해 외로움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내포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는데, 무엇보다 작가가 그 폭력성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 본인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몇 년이 지나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그 안에서 자신을 안아줄 이를 찾아나서는 그의 감정들은 어떤 과정들을 거치고 나름의 형태를 띄어 간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이번 <애실>전에 선보인 그의 작업들은 과거 연구작과 의미적으로 또 형태적으로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껴진다. 언어를 바꾸고 말을 줄이며 색깔을 소거해 나갔다.
이번 전시의 포스터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메인 아이템으로 보여지는 작업은 <애체_ 베개 두 개>이다. 처음 기획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바로 이거지!” 하고 손뼉을 쳤을 정도로 기대가 되었고, 또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순백의 베개가 서로 엮어져 주름이 지고 볼륨을 보이는 모습은 마치 하얀 대리석 조각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으며, 또 그것이 만들어지는 형태가 한 쌍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은 작가가 그동안 외쳐온 스킨쉽이 육체적인 해소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안아주는 포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를 실제로 보면 더욱 느껴지는 것인데 늘 불안감과 두려움, 그리고 상처와 괴로움 속에 있는 이가 힘이 아닌 애절함으로, 복수가 아닌 바람과 그리움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바탕으로 했을지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을 지금 쓰면 너무 과할까 고민하였는데, 성(性)이 수양을 거쳐 성(性)을 지향하는 것처럼 느껴져 은근히 감동적이고 여운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나는 이 작업이 너무 아까워서, 이번 전시에서 공개하지 말고 다음에 더 큰 기회 때 공개하는 것은 어떨까 제안하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운동화 두 켤레, 한 쌍의 넥타이 고리 등의 작업들도 그 나름의 수양과 미학이 만나는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줄이 엮이고 고리가 서로 물리면서 이것은 ‘쌍’을 이루는 것이 단순히 두 개가 함께 있는 것 만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함을 보인다. 그래서 ‘쌍’과 ‘켤레’라는 단어는 두 개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한 개가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하나보다.
물론 아쉬운 지점들도 있기는 하여서 가령 이번 전시의 메인이 되는 베개 두 개의 경우, 아이디어에 비해 다소 퀄리티와 구성에 대해서 다소 아쉬움을 느끼기는 한다. 좀더 여물었을 때 공개하는 것은 어땠을까. 또 면도기 작업은 다른 작업들에 비해 의미상으로 동떨어진 듯 하고, 여벌의 옷 작업은 다소 마켓을 의식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작가가 취해본 도전의 나열 같아서 전체적으론 재밌다는 생각은 든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몇 번 하였다. 물론 젊은 작가의 성급함이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꼭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전시의 형태가 나름대로 괜찮게 나왔다고 생각하였을 때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앞서 서술한 데로 작가의 삶은, 앞으로도 수없이 마주쳐야 할 많은 모험들 속에서 괴로움과 상처들로 가득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러한 만큼 인정받음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감탄한 지점들 너머에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그의 절실함과 갈망이 바탕이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에 엎드려 기회를 노리고, 그의 눈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에 굳이 여유를 가질 틈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수 없다. 또 그럴 마음도 없고. 그저 피그헤드랩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만의 작은 성전을 만들어 낸 것을, 나는 관련인이자 목격자로서 기억하고자 한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일 것이다.